김정남 암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됐던 북한 국적 용의자 리정철(47)이 3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된 뒤 추방 절차를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북한인 용의자 8명 중 유일하게 체포됐던 리정철이 풀려나면서 이 사건의 배후는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리정철은 이날 아침 8시 50분쯤 세팡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곧바로 푸트라자야에 있는 이민국 본부로 이송됐다. 경찰 호송차에 올라타기 전 잠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수염이 자라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방탄조끼를 착용했으며, 허리 뒤로 묶인 양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6시간에 걸친 이민국 조사를 마친 그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으로 이동해 이날 오후 6시 25분 중국 베이징행 비행기를 타고 말레이시아를 떠났다. 리정철이 체포된 후 북한 대사관에 은신해 있던 두 자녀도 동행했다.
리정철은 2013년 말레이시아의 한 건강식품회사 IT 부서에 위장 취업한 뒤 실제로는 출근하지 않았다. 무역상을 자처했지만 실제 이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현지 공작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리정철은 지난달 17일 김정남 암살을 주도한 뒤 북한으로 달아난 북한 공작원 4명을 현지에서 지원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공작원 4명이 공항에 갈 때 리정철의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하지만 리정철은 경찰에 구금된 2주 동안 모르쇠로 버텼다. 차량에 대해서는 "사건 전에 나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했다.
경찰은 리정철의 기소를 검찰에 요청했으나, 검찰은 "의심스러운 정황은 있지만 암살에 가담했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며 석방을 결정했다. 결국 위장 취업으로 불법체류 중인 그를 추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사 동력을 크게 상실한 경찰은 북한 대사관에 은신해 있는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과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으로 초점을 돌리고 있다. 할릿 아부 바카르 경찰청장은 3일 베르나마통신에 "김욱일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았으며, 외교부를 통해 현광성에 대한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하지만 대사관은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신병 확보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북한 측은 잠시 주춤했던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고위급 대표단 일원으로 말레이시아를 방문 중인 리동일 전 유엔대표부 차석 대사는 2일 기자회견에서 "사망자는 화학무기가 아닌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며 "VX가 사실이라면 국제기구를 통해 검증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할릿 청장은 "북한이 어떻게 떠들어도 눈앞에 사실이 나와 있다"며 "(심장병이 아니라) 살인으로 사망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으며 이미 전문가들이 이를 검증했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외교부는 이날 성명을 내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한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특히 공공장소에서 이를 사용한 것은 일반 대중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한편 현지 매체인 뉴스트레이츠타임스는 병원에 안치된 김정남 시신에 남아 있는 문신 사진을 입수해 3일 자 신문에 공개했다. 시신에는 낚시꾼이 잉어 두 마리를 낚아 올리는 문신이 배꼽 위부터 가슴에 걸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문신은 지난 2013년 일본 언론에 공개된 김정남 사진의 문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김정남의 가족이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경우 이 문신은 시신의 신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 공개로 "사망자가 김정남이 아니다"는 북한의 음모론도 힘을 잃게 됐다. 김정남이 피습 직후 공항 의무소에 혼절해 있는 사진에는 배꼽 아래 맨살에 문신이 보이지 않는데, 일부 매체와 네티즌들은 이를 두고 김정남이 아닌 증거라고 주장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