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밤, 골목길에 들어서면 한 사내가 생각난다. 김현식이다. '골목길'을 부른 그는 1990년대 초 세상을 떠났다. 서른둘이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며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땅 위에는 가왕 조용필, 땅 밑(언더그라운드)에는 가객 김현식이 있다"고. 그는 상처 입은 야수의 울부짖음으로 노래하다 절정기에 스러졌다.
나는 골목길을 좋아한다. 골목길에는 사연이 많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만나거나 헤어지는 공간은 대개 골목길이다. 남자가 기회를 포착해 입술을 훔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묘한 상상을 하며 여친의 창밖을 서성거린다. 청춘에게는 욕망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가끔 궁금하다. 그 시절, 첫 키스는 왜 늘 골목길에서 이루어졌는지.
대학가 골목길에는 술집들이 숨어 있었다. 나는 1980년대 청춘들을 사로잡았던 신촌 어느 골목의 술집 '레드 제플린'을 잊지 못한다. 퇴폐적이라 쓰기보다 데카당한 술집이라 불러야 어울리던. 히피들의 아지트, 새벽 2시가 가장 북적였다. 자욱한 연기 속에 술잔을 들이켰으며 무척 혼란스러웠다. 강남역과 홍대입구가 뜨기 전 신촌에는 특이한 술집이 많았다. '러시' '크로스 아이' '장미빛 인생' '난다랑' '츄바스코' '섬' 등등이다. 순례하듯 술집들을 돌아다녔고 밤새 마시다 종종 모르는 사람끼리 첫새벽을 맞았다. 세월이 흘렀다. 구석구석에 숨어서 우리들의 이십대를 빛나게 해줬던 소중했던 공간들도 모두 사라졌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의 골목길은 가슴이 뛰지 않는다. CCTV와 방범등이 계엄군처럼 지키는 골목길에서 그 옛날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이 없다던 남루했던 젊은 날의 골목길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그 시절 방황하던 청춘들이 뚜렷이 기억하는 글귀가 있다. 흰 광목천에 검은 묵필로 쓰여 있던 술집 '섬'의 시구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시 '섬'이다. 아, 오늘 문득 그 섬에 가고 싶다.
※3월 일사일언은 김동률 교수를 비롯, 박상일 출판사 수류산방 방장, 고군일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김정민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최인아 책방 대표가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