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일본 삿포로 마코마나이 실내 링크. 동계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승에 4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한국의 심석희(20)와 중국의 판커신, 짱이쩌 그리고 일본의 이토였다.

시작 총성이 울리자 판커신이 가장 먼저 스타트를 끊었고 심석희가 뒤를 이었다. 심석희는 결승선을 앞둔 마지막 코너에서 판커신의 안쪽으로 파고들며 추월을 시도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이때 판커신이 왼손을 뻗어 심석희의 오른발을 잡았다.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던 한국팀 관계자들이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쇼트트랙은 몸싸움이 빈번한 종목이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손을 쓰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자국 에이스에게 1등을 밀어주려고 다른 선수들이 방어벽을 치는 경우(팀 스케이팅)는 있었지만, 이날 반칙을 한 판커신은 1등을 달리는 상태였다. 3위로 들어오던 중국 동료 짱이쩌를 의식하고 '자폭 작전'을 펼친 것이다. 결국 심판진은 판커신은 물론 앞서 반칙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심석희도 실격 처분했다.

중국의 물귀신식 '팀 스케이팅'은 준결승부터 나타났다. 이때의 타깃은 500m 금메달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최민정(19)이었다. 한·중전으로 치러진 준결승 2조에서 중국의 구오이한이 최민정의 전담 마크 맨으로 나섰고, 자기 레이스보다는 '최민정 방해'가 주목적으로 보일 만큼 노골적인 팀 스케이팅을 했다. 중국 계획대로 최민정은 4위를 기록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5~8위가 다투는 파이널 B에서 1위를 한 최민정은 결승에서 심석희와 판커신이 모두 실격되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은 중국의 짱이쩌에게 돌아갔고, 은메달은 결승에서 최하위(4위)로 들어온 일본의 이토가 차지했다. 남자 500m 경기에선 서이라(25)와 박세영(24)이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에 이어 남자 경기 금메달도 중국에 돌아갔다.

쇼트트랙 500m의 금메달 꿈은 이번에도 무산됐다. 21일 500m 결승 경기 마지막 바퀴에서 1위로 달리던 판커신(왼쪽)이 추월하려는 심석희의 오른쪽 무릎을 잡아채는 모습. 3위로 달리던 중국 짱이쩌가 우승했다.

[심석희 스케이트선수는 누구?]

현장에 있던 빙상계 관계자는 "중국이 처음부터 작전을 세우고 나온 게 분명하다"고 봤다. 이날 경기를 통해 한국 쇼트트랙은 1년이 채 남지 않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를 안게 됐다. 이대로라면 평창에서도 중국의 '물귀신 작전'에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평창에 이어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뒤 한국이 주름잡고 있는 빙상 종목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사활을 걸고 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는 "중국의 경기 방식은 기존 쇼트트랙 몸싸움의 수준을 넘어섰다"며 "뭔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계속 당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번 대회를 통해 쇼트트랙의 마지막 숙제인 500m 정복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흑역사'를 이어가게 됐다. 그동안 500m는 폭발적인 스피드를 낼 때 필요한 근력과 몸싸움이 좋은 선수들의 텃밭이었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지만 지금껏 올림픽에서 500m 금메달은 하나도 없다. 남자까지 범위를 넓혀도 23년 전인 1994 릴레함메르올림픽(채지훈)의 금메달이 유일하다.

최민정은 지난해 여름부터 500m 정복을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력을 늘렸고 몸무게도 2㎏ 정도 불렸다. 지난해 12월 월드컵 때는 여자 500m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빙상연맹은 "500m 정복은 한국 쇼트트랙에 남은 마지막 과제"라며 "중국의 반칙 작전을 넘어서야 평창에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팀 스케이팅(team skating)

쇼트트랙 개인전에서 국적이 같은 두 명 이상의 선수가 소속 국가에 유리한 결과를 내려고 협력하는 비신사적 경기 방식. 다른 국가의 우승 후보를 경기 내내 견제해 같은 국가 선수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대표적이다. 때로 실격을 감수하고 손이나 몸을 써 방해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