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철 경제부 차장

작년 6월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수장인 제이컵 루 재무장관이 전격 방한해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를 만나고 갔다. 그는 '환율 조작국' 지정 요건 세 가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200억달러를 넘고,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를 넘으면서 외환시장 개입액이 GDP의 2%를 넘으면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한다는 것이다. 무역수지나 경상수지 규모는 조정하기 어렵다. 정부나 한은이 당장 할 수 있는 건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환율에서 손 떼라"는 메시지였는데, 이를 전하는 루 장관 태도는 정중했다.

트럼프 정부는 과거 미 정부와 달리 환율 문제를 거칠게 다룬다. 최근엔 중국·일본·독일을 환율을 조작하는 나라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나섰다. 이들이 환율 조작으로 막대한 대미 흑자를 본다는 것이다. 세 나라보고 알아서 통화 가치를 높여 달러 약세를 만들라는 협박이다.

그렇지만 '강(强)달러' 발톱도 보인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앞선 인사 청문회에서 "달러 강세는 미국이 얼마나 매력적인 투자처인지 반영한다"며 "장기적으로 달러 강세가 중요하다"고 했다. 사실 트럼프의 환율 조작국 비난과 달리 다른 정책은 '강달러'를 지향한다. 경기 부양책으로 미국 경제가 좋아지면 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다. 금리 상승은 미국으로 달러를 끌어들여 강달러를 만든다. 해외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고 이민을 막아도 달러는 미국에 투자된다.

미국 상원은 13일(현지시각) 본회의 투표로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출신 은행가인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인준안을 찬성 53표, 반대 47표로 통과시켰다. 사진은 므누신(오른쪽)이 이날 백악관에서 재무장관 취임 선서를 한 뒤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큰 흐름만 보면 2014년 중반부터 '강달러' 추세다. 미국이 "경기 회복 궤도에 올랐다"며 달러 푸는 일을 그만하겠다고 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친(親)기업 트럼프로선 '강달러'가 심해져 미국 수출 기업들이 고통을 호소하면 달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니 트럼프 시대엔 '강달러' 추세 속에서 말로 협박하거나 환율 조작국 지정 카드를 꺼내 들어 그 수위를 조절하는 일이 잦을 공산이 크다.

트럼프의 의중이 '강달러냐 약달러냐'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미국은 필요에 따라 '강달러'를 추구해 전 세계에 풀린 달러를 회수할 수 있고, 환율 조작국 지정 위협으로 달러 약세를 부를 수도 있다.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 낼 수 있으니 '외환 위기'란 단어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는 트럼프가 남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트럼프는 '화폐 전쟁'에서 쓸 카드가 많다.

우리처럼 외국 의존도가 높은 나라엔 악재다. 그러니 달러 움직임에 촉수를 더 높게 뻗어야 한다. 동시에 비상 대책도 준비해야 한다. 화폐 전쟁 와중에 수출이 타격받아 성장이 멈출 때를 대비해 비상금을 풀 시나리오를 미리 짜놔야 한다. 가계 부채 1300조원 등 위험 요인은 미리 줄여놔야 한다.

"졸면 죽는다. 그간 많은 화폐 전쟁, 금융 위기를 헤쳐나가며 얻은 교훈이다." 국제금융을 오래 담당했던 전직 고위 경제 관료가 최근 해 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