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 뉴욕 FIT 교수·디자인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파리처럼 로맨틱하지도 런던처럼 활력이 넘치지도 않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 이곳의 케이크는 오스트리아 케이크만큼 예쁘고 맛있으며, 350 여종의 맥주도 독일이나 체코의 맥주와 견줄 만큼 다양하고 훌륭하다. 무엇보다 꽃이 인근 네덜란드만큼 유명해서 도시 전체가 꽃향기에 젖어 있다. 꽃가게의 예술적 디스플레이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여름에 브뤼셀 광장을 꽃 75만 송이로 장식하는 행사 또한 유명하다. 거리엔 초콜릿 상점이 넘친다. 연간 14만t, 2조원 넘는 매출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초콜릿 생산국답다. 고디바, 길리앙, 노이하우스 등 우리에게 친숙한 대형 브랜드 외에도 가내수공업으로 만드는 다양한 초콜릿이 수두룩하다. 초콜릿은 입안에서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향을 남기며 금세 녹아 사라진다. 오래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달콤한 순간이다. 벨기에인들은 이 순간의 행복을 지극히 사랑한다. 그래서인가. 일상생활도 매우 여유롭고 감각적이다.

브뤼셀 거리를 걷다 보면 종종 재미있는 풍경을 만난다. 건물 외벽에 대형 만화가 벽화처럼 그려져 있다. 1991년 시의회가 만화박물관(Centre Belge de la Bande dessinée)과 함께 '시민이 사랑하는 만화를 거리로 가져오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시작한 프로젝트다. 굳이 박물관에 찾아가지 않아도 출근길이나 점심시간에, 또는 산책을 나왔다가 예술을 감상하는 개념이다. 이 그림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미소를 짓는다. 만화 속 추억의 명장면들은 행인의 정서를 단숨에 수십 년 전으로 돌려놓는다. 주인공들이 실시간으로 우리를 자기들 세계로 초대하는 것 같다. 옛날에 보았던 만화의 스토리와 장면이 기억나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마음에 만화가 있으면 동심이 있고 행복이 있다.

만화는 벨기에의 가장 매력적인 문화 상품이다. 벨기에는 국토 면적 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만화가가 활동하는 나라다. 매년 3000종 넘는 만화가 만들어지고, 전 세계 만화책의 20%가 이곳에서 출판된다. 시내 곳곳에 만화책과 캐릭터 상품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고, 만화 제목으로 명명된 길 이름도 여럿 있다. 이곳에서 만화는 '방드 데시네(Bande dessinée)'라고 불리는데, 불어로 '그림띠'라는 뜻이다. 이미 1960년대부터 제9의 종합예술로 자리 잡았고,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만화 전시회가 열릴 만큼 '예술'차원에서 인정받고 있다. '벨기에인의 영혼은 만화와 교감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화는 이들 인생의 일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탱탱의 모험(Les aventures de Tintin)'이나 '스머프(Les Schtroumpfs)'는 그 대표적인 예다. 탱탱은 '유럽 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르제(Hergé)의 작품으로, 1929년 신문 연재를 시작으로 1983년까지 50여년간 총 24권의 합본이 만들어졌다. 60여국에서 3억 부 넘게 팔렸다. 페요(Peyo)의 스머프 역시 20여 언어로 번역돼 30여국에서 출판되고 TV로 상영됐다. 이런 문화를 대변하듯 브뤼셀 시내에 있는 만화박물관 입구에 탱탱과 스머프의 커다란 동상이 서 있고, 각종 만화 캐릭터 모형과 스케치, 원화 제작 과정, 작가들의 소품과 도구가 전시돼 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건물 외벽에 그려진 대형 만화 벽화.

유럽인이 좋아하는 희곡 '파랑새(L'Oiseau bleu)'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벨기에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eterlinck·1862~1949)의 작품이다. 연극을 비롯해 오페라로 만들어졌고,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됐다. 어린이가 주인공이지만 사실 어른을 위한 연극으로, 주제 또한 매우 심오하다. 동화와 같은 배경 설정과 시적 환상으로 유명해 많은 무대 디자이너에겐 그 세트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 꿈이다. 행복은 저축할 수 없고, 순간에 즐겨야 하며 결국은 마음속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인공 남매가 케이크를 좋아하는 설정 역시 매 순간 달콤한 행복을 찾는 인생을 나타내고 있다. 연극의 각 막은 이 행복이라는 주제의 은유로 빛나고 스토리는 온화하게 끝난다.

벨기에에는 파랑새가 살지 않는다. 하지만 벨기에인은 한 번도 못 본 파랑새를 아주 잘 안다. 그들이 사랑하는 연극을 통해서다. 그리고 그 연극을 통해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파랑새가 실제로 없지만 마음속에 항상 있는 것처럼 만화 역시 상상의 세계에 있지만 늘 우리의 추억과 함께한다. 만화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달콤한 초콜릿, 거리의 만화, 그리고 극 중의 파랑새는 우리를 아주 단순하고 소박했던 동심의 순간으로 돌려놓는다. 브뤼셀은 그 동심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장치를 군데군데 심어 놓았다. 도시를 걸으며 이런 걸 발견하는 건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