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펜티멘토’라는 용어가 있다. 유화작품에서 덧칠한 부분이 벗겨지면서 드러나지 않던 밑그림이나 화가가 그렸다가 덮은 부분이 다시 노출되는 현상을 뜻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어쩌면 시가 펜티멘토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나게 한다. 치마를 좋아하는지 바지를 좋아하는지, 강아지를 좋아하는지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봄을 좋아하는지 가을을 좋아하는지.

예술작품은 더하다. 내가 어떤 소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구절에서 마음 아파했고 어떤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오랜 시간 내 안에 쌓인 감정과 과거를 되살려내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이 일주일에 한 편씩 고르고 고른 시를 배달하며 ‘나’를 드러냈다. 종소리가 땡땡 울리게 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들, 그리고 거기에 소설과 영화, 그림을 엮어 새 책 를 펴냈다.

“유화에서 화가가 덧칠해 지운 밑그림이나 그전의 그림이 나중에 드러나는 것을 펜티멘토라고 합니다. 시도 펜티멘토 같은 것일지 몰라요. 긴 세월 동안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진짜 얼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감정들, 깊숙이 숨겨버린 그리운 기억을 끄집어내어 다시 보고 느끼게 해주니까요.”

현직 미술관장이 시를 주제로 책을 낸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유년시절 꿈이 시인이었다고요.
어릴 때부터 시와 소설을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었어요. 무협소설도 많이 봤죠. 잠도 안 자고 책에 너무 빠져 있으니까 어머니께서 제발 책 좀 그만 읽으라고 하실 정도였는데, 그러면 이불 속에 들어가서 몰래 읽었어요.(웃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잖아요. 시 비슷한 걸 적으면서 시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졌었어요.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미술 일을 하게 됐고, 시를 계속 읽긴 했지만 그 꿈은 잊고 있었어요. 이렇게 시를 주제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죠.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살이가 귀환 회로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지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죠.

책의 구성이 참 좋아요. 처음에 시를 읽고, 소설이나 영화 이야기를 곁들여 해설해주신 글을 읽은 다음 마지막에 그림을 보게 되잖아요. 시, 글, 그림으로 옮겨가면서 감정이 증폭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미술관을 운영하면서도 한 가지 주제로 여러 가지를 연결해 재미있게 푸는 전시를 많이 하셨죠. 융합에 재능이 있다는 건 언제 알게 됐나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제 취향에 맞더라고요. 나와 궁합이 맞는 부분에서는 창의성이 발휘되지만 제가 잘 못하는 부분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무능해요.(웃음) 기계, 숫자 이런 부분엔 전혀 소질이 없죠. 심지어 숫자 0 하나를 빼거나 잘못 붙여서 백만원을 천만원 만들고 천만원을 백만원 만든다니까요. 한쪽으로의 쏠림 현상이 있어요.(웃음)

시에 맞는 미술작품이나 소설, 영화는 그냥 머릿속에서 저절로 찾아지는 건가요?
오랫동안 축적이 되니까 작동을 하는 거예요. 서로 연결도 하고 신호도 주고 엮고 그러는데, 그런 쪽이 적성에 맞나 봐요. 저는 시인도 되고 싶었고 미술가도 되고 싶었던 사람이잖아요.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자꾸 편집을 하고 연출을 하더라고요. 창조자가 되지 못하고 매개체의 역할로 끝나야 하는 건가 싶어 처음에는 열등감도 많이 느끼고 상처도 받았어요. 지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구나. 제2의 창조도 큰 재능일 수 있겠다'고 받아들이고 만족해요. 그것도 어디예요? 욕심내면 저만 다쳐요.(웃음)

매일 저녁에는 영화와 책을 보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신다지요. 그 많은 시, 소설, 영화, 미술작품을 어떤 식으로 정리해놓으세요?
일단 머릿속에 때려 넣는 거죠.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면 아침이고 밤이고 그 생각만 해요. 오늘은 예를 들어서 캔버스가 키워드다. 그러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다 캔버스로 보이는 거예요. 보면요, 조그마한 로봇이 몇 바퀴 돌면 막 뭐가 달라붙으면서 커다래지잖아요. 저도 어떤 메커니즘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머릿속에 내가 사랑하는 키워드를 갖고 다니면 자석처럼 여러 가지가 붙으면서 가시화돼요. 그럼 글을 쓰는 거죠.

책에는 28편의 시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 일주일에 한 편씩 추천해준 시들이라고요. 그분이 누구인지는 얘기 안 해주실 거죠?
네.(웃음) 그분한테 책을 낸다는 말도 안 했어요. 아마 지금쯤은 아시겠죠.

어떤 계기로 시를 추천하게 된 건가요?
우연한 기회였어요. 제 어릴 적 꿈이 시인이었고 또 지금도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안 되는데요. 그분들에게는 제가 신문에서 보고 오려놓았던 시를 보여드리기도 하고 가끔 애송시를 낭송하기도 하거든요. 그런 분들 중 한 분에게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흔쾌히 좋다고 하셨죠.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금방 한 편 골라서 보낼 줄 알았는데 최소 이틀이 걸렸어요.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어느 수준에 맞춰야 하는지, 또 나와 그 사람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하니 고민이 많았죠. 시집 한 권을 다 보고, 좋아하는 시집을 꺼내 봐도 한 편을 고르기가 힘들더라고요. 종소리가 땡땡 울리는 시를 만나야 하는데, 그게 아니면 추천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과정이 힘들었어요.

그렇게 고르고 고른 시들이니 좋을 수밖에 없었군요. 저는 책을 보면서 큐레이션이 참 매력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보기 아까운 작품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분은 시와 가깝게 지낼 수 있거나 시를 좋아할 만한 직업군에 계신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시를 보내면 '시가 나와 참 잘 맞는다'거나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해주니 신기하고 사명감도 들었죠. 그러면서 더 공을 들이게 됐고요. 그렇게 추천한 시가 벌써 60편이 넘어요. 그러다 보니 이걸 두 사람이서 간직하기보다 이 시를 좋아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온 거죠. 운명적이었다고 거창하게 말하긴 그렇지만, 늘 내 마음속에 첫사랑처럼 있던 시들을 우연한 기회에 엮어낸 거니까 필연이었나 보다 그래요. 세상에 억지로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네. 무언가 억지로 만들어서 일을 한다거나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요.(웃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타입이거든요.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가족이나 부모가 말려도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요. 절대적으로 본성의 목소리를 따르는 편이죠. 그래야 깨지고 안 좋아도 후회가 없잖아요.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요. 우리나라에서는 개성을 드러내기가 어려워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자기를 포기하는 쪽으로 살길 원하죠.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과 타인이 원하는 것은 일치할 수 없잖아요. 예를 들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니까 안정된 길을 가길 원하는데 나는 모험을 하고 싶고. 그러면 부모는 제지를 하고 나는 뛰쳐나가는 거죠. 서로 상대를 생각해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늘 그런 갈등을 겪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인생이 주어져도 또 내가 원하는 쪽으로 선택하며 살 것 같아요.

다행히 예술 쪽으로 오셨네요. 개성이 있을수록 좋은 분야니까요.
이쪽은 튀는 걸 권장하는 곳이에요.(웃음) 그런데 미술가도 시인도 관람객이나 독자를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아요. 자기 내면을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해 만드는 건데 그 결과물이 보는 사람과 맞물리고 공통점이 있을 때 좋을 뿐이죠.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작년에 라는 영화를 봤는데요. 남자 주인공은 세계 최고층 빌딩 사이를 밧줄로 연결해 장대를 들고 횡단하는 게 꿈이에요.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하는데도 여자친구는 옆에서 북돋워주고 응원해주죠. 그런데 남자가 횡단을 해내고 나니까 여자친구가 그래요. "It's my turn." 이제 내 꿈을 이룰 차례라고요. 저는 그게 좋았어요. 결국 헤어짐을 택하지만 각자의 꿈을 이뤄내는, 그들의 방식인 거죠. 두 사람이 함께할 때는 서로의 꿈을 병행하기가 어려워요. 한 명은 희생을 해야 한다는 거거든요. 고통스럽고 외롭지만 자기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런 갈등이 따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책의 제목이 예요. '좋아하세요?'도 아니고 '좋아하세요!'도 아니고요. 말줄임표 속에 어떤 느낌을 담은 건가요?
말하지 않고 끄집어내지 않는 생각들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아무리 가까워져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절대 일치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인간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죠. 물론 그 사람과 내가 완전히 일치되는 것 같은 순간도 있어요. 하지만 너무 짧게 지나가죠. 에서도 보여주잖아요. 한 사람은 늙은 채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고, 한 사람은 어리게 태어나 점점 나이 들고. 두 사람이 교차되는 딱 그 정점에서 바로 어긋나버려요. 그래서 인생이 쓸쓸한 거죠. 옛날에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은 수용해요. 인간의 쓸쓸함, 고독함, 어긋남을 알지 못하고 수용하지 않으려 하면 갈등이 왔을 때 해결할 수가 없어요. 요즘 우리나라가 시끄러운 것도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자신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겉껍질은 허상이라는 걸 알 텐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한 일이 생긴 거죠. 그 어떤 것도 영속적인 것이 없잖아요. 3년만 지나도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예술작품 감상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학교 미술교육도 실기가 아니라 감상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신 바 있어요.
거품과 허황된 생각이 빠지고 본질을 직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방방 떠서 내가 누군지 모르고,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고 이상한 짓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술작품은 그런 걸 진정시켜주죠. 책에 나오는 김선우 시인의 시에 보면 "봄꽃 그늘 아래 가늘게 눈 뜨고 있으면/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좋아 (…) 참 좋은 날이야/ 내가 하찮게 느껴져서/ 참 근사한 날이야/ 인간이 하찮게 느껴져서"라는 구절이 있어요. 스스로 하찮은 존재일 수 있다고, 별것 아닌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 비하가 아니라 거품을 빼는 일이에요. 저는 독서나 예술을 통해 조금 더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제 주변 사람들은 다 작품으로 자기 내면을 풀어내는 사람들이에요. 물론 예술가에게는 그만의 어려움이 있죠. 또 어떤 사람은 돈을 가졌지만 마음이 공허할 수 있고요. 겉으로 보면 다 편안해 보이고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어요. 며칠 전에 모임이 있었어요. 높은 지위에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조찬모임인데 한 분에게 "당신 외로워요?"라고 물으니까 "아니,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자기 분야에서 잘 알려진, 성공한 사람이에요. 직업 때문에라도 감성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인데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되묻더라고요. 모든 인간은 고독하지만, 조금이라도 이겨내 보기 위해 무언가 계속 찾고 시도해야죠. 그래서 시를 찾고 그림을 찾는 것 같아요.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문학이나 미술을 자주 접하지는 못해요. 그런데
를 보고 있자니 인간에 대해 공부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 안에는 인생과 내면의 풍경들이 다 들어 있어요. 제가 오바마 대통령을 좋아하는데 이번에 고별사에서 "Yes, We Can" 그랬잖아요. 정말 "I Can Do It!" 하고 싶죠.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고자 하는 극기의 자세들.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하고 싶은데 이겨내는 거구나. 굉장히 많이 배우죠. 모든 게 행복하고 충만한 사람이었다면 시를 읽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시를 읽는다는 건 결핍이 있다는 이야기예요. 자아실현, 가정환경, 콤플렉스, 실연, 그런 각자가 가진 몫의 결핍과 아픔들이 있죠. 라는 영화에 보면 천사가 인간들을 쭉 봐요. 각자 살아가는 형태를 보니까 문제가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걸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중요하죠.

시를 읽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시는 메타포의 정수잖아요. 은유는 피곤한 과정이에요. 눈동자가 빛난다고 하면 될 걸 별처럼 빛난다고 하면서 한 단계 더 거치니까요. 그런데 그 메타포가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동을 주는 거죠. "내 것이 아닐 수 있는 삶"이라는 시구를 만났어요. 들여다보면 너무 좋지만 머리가 아프잖아요. 그런데 그 단계를 넘으면 빠져들게 되죠. 이 메타포가 죽여주니까요. 한번 빠지면 다른 게 심심해져요. 시는 수십 개의 결을 가진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잠깐 이야기해서 바닥이 다 드러나는 사람은 재미없잖아요. 신비한 베일에 싸인 것처럼 계속 아른거리는 사람이 좋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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