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일 2017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잠시 보세요, 주민 여러분.' 이렇게 시작하는 '대자보'를 봤다. 사실 대자보라 표현한 것은 내 생각일 뿐 신문지 반 장 크기의 종이에 쓴 개인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글에 불과했다. 혼자 대본을 쓰다가 대사가 막혀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오는 어느 가을 밤이었다. 동네 아파트 후문 밖 전봇대에 기대 놓은 손수레 뒷막이 판에 붙어 있는 글이었는데 스스로를 '못난 저'라고 칭하면서 '함께 살 50세 전후의 여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서툰 글씨와 문장은 차치하고, 구인·구직도 아닌 구녀 광고라니…. 참 별스러운 사람이다, 싶었다.

새해를 맞고 며칠 뒤 예의 그 대자보를 또 봤다.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세요' '가정마다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으로 봐선 지난가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러다 '밖이 추우니 외출할 때 옷 많이 입고 다니래요'를 읽고는 '아하! 원을 푸셨구나' 싶어 매서운 밤 공기에 얼어있던 안면의 고통에도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란 늘 '해피'할 수는 없는 것일까. 긴 골목 담장 위로 감꽃이 피고 감이 열리고 붉게 익어 떨어질 때까지 그의 대자보를 두 번 더 봤다. '못난 저는 배운 기술도 없고 돈도 없고 몸도 좀 아파요. 둘이 힘들게 고생하면서 살 55세 정도 혼자 사는 여자분을 찾습니다'가 세 번째 대자보였고, '주민 여러분, 그동안 이 글 써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새로운 맘으로 혼자 살 맘을 먹었습니다. 세상의 여자분들도 행복하세요'로 맺은 글이 마지막 대자보였다.

초등학교 뒷산 아까시나무 꽃 향이 날리고 정상으로 난 긴 등산로가 흰 눈에 덮여도 손수레 뒷막이 판에는 이후 아무 글이 붙지 않았다. 대본을 쓰는 밤, 오늘도 나는 동네 아파트 후문 밖 전봇대 앞을 서성이게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