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오후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 전까지 그의 이런 결심을 아는 참모들은 거의 없었다. 반 전 총장은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 질문에 "오늘 오전에 혼자 (불출마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오후 3시 30분 국회 본관 1층 정론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불출마를 선언했다. 회견 30분 전쯤 기자들에게 공지됐지만 그때도 내용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때 반 전 총장은 국회 본관 2층에 있는 정의당 대표실에서 심상정 대표를 만나고 있었다. 그는 앞서 이날 오전 10시 20분에는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을, 10시 50분에는 근처 바른정당 당사에서 정병국 대표를 잇달아 예방했다. 이날 반 전 총장의 국회 기자회견은 이도운 캠프 대변인이 오후 2시 41분 새누리당의 한 의원에게 요청해 잡혔다. 불출마 선언을 읽어 내려갈 때까지도 이 대변인 등 주요 참모들은 "이런 내용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반 전 총장은 전날 밤 일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많은 조언을 부탁한다"며 의욕을 보였었다. 유엔 사무총장 시절 각종 업적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며 "내가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도 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1일 오후 3시 30분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일정을 치렀다. 오전에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을 예방했고(왼쪽), 이어 바른정당 당사에서 정병국 대표를 만났다(가운데). 불출마 선언 30분 전에도 국회에서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만났다(오른쪽). 반 전 총장은 각 당 대표들과 면담할 때도 불출마와 관련한 낌새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기문 대선 불출마 선언]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반 전 총장이 밤새 마음을 바꿔 불출마를 결심했다는 얘기다. 부인 유순택씨와도 1일 새벽에 심각하게 정치적 진로에 대해 논의를 했다고 한다. 반 전 총장은 이날 불출마 선언 뒤 마포 캠프로 돌아가 참모들에게 "오늘 새벽에 일어나 곰곰이 생각하고 불출마 발표문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불출마 선언문까지 작성해 품에 넣은 채로 정당 대표 예방 일정을 소화한 것은 설명이 잘 안 된다. 이에 대해 캠프 관계자는 "외교관 출신인 반 전 총장이 약속된 일정을 깨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했다. 이도운 대변인은 "이미 마음은 어느 정도 굳혔지만 그때(새누리당과 바른정당 대표 예방)까지도 (불출마 선언까지 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반 전 총장 영입에 적극적이었던 새누리당과 바른정당 대표들의 '싸늘한' 반응을 확인한 뒤 불출마를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반 전 총장은 최근 별도 결사체를 조직한 뒤 바른정당 등과 연대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바른정당 정병국 대표는 이날 "당 대 당 합당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새누리당 인명진 비대위원장도 이날 반 전 총장에게 "나이가 들어 여기저기 다니면 낙상하기 쉽다"고 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캠프 관계자는 "반 전 총장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다"며 "보수 정당들마저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걸 확인하고 결심을 굳힌 것 같다"고 했다. 반 전 총장도 이날 참모들에게 "'표를 얻으려면 보수 쪽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많이 들었는데 이는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이야기"라며 "보수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했다.

귀국 후 20일 동안 지지율이 계속 하락한 것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캠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날 아침 배달된 세계일보 조사에서 반 전 총장은 13.1%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32.8%)에게 크게 뒤졌다. 이런 조사 결과를 아침에 확인하고 충격을 받은 것 아니냐는 얘기다. 한 참모는 "반 전 총장이 열흘 전쯤부터 흔들리는 것 같아 '지지율은 반등할 수 있으니 버텨야 한다'고 설득해왔는데 고민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반 전 총장은 주변에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게 싫다"는 말도 자주 해왔다고 한다. 이를 놓고 "가족과 관련한 각종 의혹과 루머가 제기된 데 부담을 느낀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이날 오전에도 정치권에는 반 전 총장 조카와 관련된 새로운 의혹이 SNS를 통해 유포됐다.

반 전 총장 불출마에 대해 이도운 대변인은 "지난 20여일 동안 활동한 결과를 보고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일 귀국한 반 전 총장은 지난 21일부터 김종인·김한길·손학규·박지원 등 야권의 대표적 '제3지대론자'들을 차례로 만났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반 전 총장과 함께하기 어렵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참모들에게 "정치 참여는 살면서 가장 잘못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