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가로등으로 위장한 루멘 베르미스(Lumen Vermis)는 전기를 훔치며 살아간다. 행인이 없을 때 다른 가로등으로 옮겨가려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간혹 목격된다. 거대한 흑거미를 닮은 어바너스(Urbanus)는 도시 초고층 빌딩 옥상에 서식한다.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 없는 도시인들 눈에 띄긴 어려우나 간혹 상공에서 어바너스를 발견했다는 어린이들 신고가 접수된다.

각종 공구와 기계 장비로 가득한 최우람의 작업실.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기괴한 생명체들이 대구미술관에 집결했다. 모양도, 이름도 해괴한 거대 금속 물체들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바닥에서 꿈틀대는 장관에 관람객은 탄성을 내지른다. 이 신비한 생명체를 창조한 이는, 움직임을 주 요소로 삼는 예술인 '키네틱 아트'의 선두 주자 최우람(47)이다. 6월 대만 전시를 앞두고 자신의 20년 작업을 돌아보는 개인전 '스틸 라이프'를 펼치는 중이다. '지하철 괴물'로 유명한 울티마 머드폭스(Ultima Mudfox·2002년)를 비롯해 바다표범처럼 생긴 금속체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형상의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2011년), 수백 개 꽃모양 발광체가 현란하게 빛을 뿜는 우나 루미노(Una Lumino·2016년) 연작 등 도쿄 모리미술관, 런던 사치갤러리,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 뮤지엄 등에서 찬사를 받았던 대표작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폐차된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떼어내 ‘별’의 형상으로 만든 최우람의 URC 연작. 14년 동안 탄 자동차를 폐차장으로 보내며 ‘그간 고마웠다’는 편지를 써서 자동차 안에 넣었다는 그는 “죽은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즐겁다”고 했다. 최우람의 모든 작품은 홈페이지 www.uram.net에서 볼 수 있다.

"상상의 존재를 인공지능이라는 최신 유행과 결합시켜 천재적으로 구현하는 작가"로 평가받는 최우람은 이 기괴한 생명체들을 서울 연희동 골목길에서 만든다. 공장이라 해도 될 만큼 각종 공구와 철물, 기계장치로 가득한 3층 규모 공간에서 동료 5명과 협업한다. 꿈이 로봇과학자였다. "마징가 제트, 아톰을 보며 자랐고 학창 시절엔 매달 방공호에 들어가 숨는 훈련을 했죠. 냉전 시대, 핵전쟁 공포 속에 자라 나중에 커서 과학자가 되면 로봇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어요."

수학을 못해 미대에 갔다는 그가 로봇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 건 대학(중앙대 조소과) 3학년 때다. "교수님이 조각에 움직임을 넣어보라는 과제를 내주셨어요. 청계천 주물 공장, 철공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그곳 사장님들한테 기계의 작동 원리, 모터와 부품들에 대한 지식, 기술을 배웠어요. 이젠 제법 풍월을 읊는 편이죠."

자기 꼬리를 물고 도는 ‘오로보로스’ 세부 장면.

"문명은 기계의 숙주"라고 믿는 그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마다 라틴어로 학명을 붙이고 탄생 신화를 만들어 붙인다. 4~5년 전부터는 정치·사회적 이슈를 담기 시작했다. '구멍의 수호자'라는 뜻의 '쿠스토스 카붐'은 소통이 주제다. "다큐를 보다 웨델 바다표범을 봤어요. 남극에 사는 유일한 포유류인데 먹이를 구하려면 얼음에 구멍을 내고 물속으로 내려갔다 와야 해요. 시간이 지나면 구멍이 얼어붙으니 매일 이빨로 구멍을 갈아줘야 하지요. 두 분리된 세계를 연결해주는 구멍에서 우리 사회 불통의 문제를 떠올렸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뱀을 모티프로 한 오로보로스(Ouroboros)는 자유와 권력의 모순을 풍자했다. 자유를 갈구해 뛰쳐나오면서도 또 다른 왕, 절대권력을 앉혀놓고 거기에 다시 구속되는 인간의 비극을 자기 꼬리를 물고 뱅뱅 도는 뱀에 비유한 작품이다. 검은 악마처럼 보이는 스케어크로우(Scarecrow)는 의미심장하다. "'구글신(神)'이란 말처럼 모르는 게 없이 신(神)의 영역을 장악하기 시작한 테크놀로지 권력을 예수상, 불상의 이미지로 제작해봤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외관도 감동이지만 관람객은 수공예를 연상시킬 만큼 빼어난 장식미에 압도당한다. 적게는 150개, 많게는 5000개 이상 부품을 매번 새로 제작해 모터와 톱니바퀴, LED 조명과 결합하는 공정을 이어간다. "잭슨 폴록처럼 캔버스에 물감 뿌려서 하는 작업이 부러울 때가 있죠. 저는 드로잉, 시뮬레이션을 거쳐 철판 하나하나에 구멍을 다 뚫어야 하니까요. 근데 어렵고 고되고 흔하지 않은 작업이라 재미있어요.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건 싫거든요." 12일까지. (053)790-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