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을 이틀 앞둔 26일 서울 강동구 길동의 사진관 RS스튜디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던 세 살배기 민호(가명)가 '풀썩' 쓰러지듯 어설프게 큰절을 올렸다. 스튜디오가 웃음소리로 가득 찼지만, 홀로 민호를 길러 온 미혼모 박모(26)씨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날 민호는 태어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초생활보장 생계비 지원을 받는 형편에 뇌전증까지 앓는 민호를 안고 병원을 오가느라 백일도, 돌도 사진 촬영 없이 그냥 지나쳤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 뒤 고아원에서 자란 박씨를 도와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민호 아빠는 임신한 박씨에게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다 민호가 팔삭둥이로 태어나자마자 연락이 끊겼다. 민호가 "나는 왜 돌 사진 없어"라고 물을 때마다 어린 엄마는 "차라리 입양 보냈으면 이렇게 능력 없는 엄마 밑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홀로 울어야 했다.
이런 박씨 모자(母子)에게 자원봉사 단체인 한국사진봉사단 김성근(53)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전업 사진작가인 김씨는 미혼모 아이의 백일과 돌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고 있다. 정부 지원금 수십만원으로 한 달을 나는 싱글맘들이 20만~30만원 하는 아기 기념사진 촬영을 포기하는 게 안타까워 시작한 일이다.
김씨의 봉사 활동은 2015년 9월 싱글맘인 임선정(24)씨에게 받은 전화 한 통에서 출발했다. "남들은 평생 간직하는 백일 사진을 내 아이만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제대로 된 백일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김씨는 그 길로 임씨를 만나 백일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김씨는 "내가 셔터 몇 번 눌러주는 게 누군가에게는 평생 간직할 추억이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김씨는 미혼모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형편이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아기 기념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겠다'는 글을 올렸다. 그때부터 가슴 아린 사연이 하나둘 도착했다. 김씨의 선행(善行)을 알게 된 동료도 발 벗고 나섰다. 덕분에 출범한 지 만 2년도 안된 '한국사진봉사단'은 회원 수가 70명으로 불어났다. 유치원 교사 출신 주부 남승주(54)씨는 노래와 율동으로 카메라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웃게 했다. 혈액암 투병 중인 주부 강인숙(65)씨는 사진 찍으러 온 미혼모들의 손을 꼭 잡아주고, 남몰래 용돈을 쥐여준다.
항상 웃을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미혼모가 '신세를 진다'는 생각 때문에 단원들에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단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조차 극구 사양했다.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다 보니 자기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두려워한 것이다. 엄마와 아이의 이름을 먼저 묻지 않는 건 단원들 사이의 '불문율'이 됐다.
어렵게 찍은 돌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된 적도 있다. 무항문증으로 태어났던 한 아기가 돌 사진을 남긴 뒤 넉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예쁜 아이 사진이라도 남길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아이 엄마의 말을 전해 듣고 김씨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이날 오후 박씨와 민호는 설날 선물을 품에 안고 인천에 있는 집으로 떠났다. 박씨는 자신이 찍힌 사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미혼모 주제에 당당하게 얼굴 들고 다니지 말고 부끄러운 줄 알라'는 댓글이 트라우마가 됐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들고 활짝 웃는 민호와 엄마의 사진은 한국사진봉사단원만 볼 수 있다. 김씨와 단원들은 "미혼모들이 예쁜 아이 사진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빌며 설 연휴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