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사흘, 일본 총리 관저는 조용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지난 20일 시정연설을 마친 뒤 주말 내내 공식 일정을 잡지 않고 도쿄 시부야구 자택에서 쉬었다. 토요일은 단골 미용실에서 이발하고, 일요일은 극장에서 할리우드 영화 '사일런스'를 본 뒤 어둡기 전에 귀가했다.

하지만 조용해 보이는 수면 아래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일본은 트럼프 당선 직후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빨리 움직인 나라였다. 아베 총리가 트럼프 당선 엿새 만에 뉴욕에 날아가 당선인 신분의 트럼프를 만났다. 이후 총리 관저와 외무성은 일본 언론에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정식 정상회담을 하겠다"며 취임 1주일 뒤인 27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까지 거론했다.

22일(현지 시각) 미국 백악관 접견실인 ‘블루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경찰관 및 구조대원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날 트위터에서 취임식 당일 거리에 나선 ‘반(反)트럼프 시위대’를 비난했지만, 2시간 만에 “평화 시위는 우리 민주주의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트럼프 대통령이 그날 만나기로 한 외국 정상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였다. 그다음엔 엔리케 페냐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이 31일 트럼프와 만나기로 했다. 일본 외무성 간부들은 당초 "미국 전체 동맹국 중 첫 번째나 두 번째로 회담하길 바란다"고 했지만, 영국과 멕시코가 앞서가자 원래 계획에서 한발 물러나 2월 초 아베 총리가 방미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성사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22일 마이클 플린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국가안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은 중요한 동맹국"이라며 "트럼프 대통령도 아베 총리와 만나 의견을 나누길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날짜 잡자는 얘기는 아니었다. 이튿날(23일) 트럼프 대통령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통화하며 "2월 초에 만나자"고 워싱턴에 초대했다. 아베 총리는 다시 밀린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아베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해온 만큼, (회담이 늦어지는 데 대해 일본 내에서) '일본을 경시하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 아베 총리가 심혈을 기울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주일(駐日) 미군기지 분담금을 얼마나 더 내라고 할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간 영토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도 불분명하다. 아사히신문은 "외무성 간부가 '트럼프의 외교 정책은 시계 불량(視界不良)'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어디로 튈지 앞이 안 보인다는 얘기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TPP)란?]

일본이 가장 불안하게 여기는 건 미·중 관계다. 요미우리신문은 "어느 날 미·중이 일본 머리 위로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본에 귀띔 한마디 없이 중국과 수교한 일을 떠올리며 "이러다 '닉슨 쇼크'처럼 '트럼프 쇼크'가 오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때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수없이 언급했다. 하지만 사업가 출신인 그가 정치도 사업처럼 접근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중국과 대판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은 조건으로 중국과 거래하기 위해 엄포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중 관계가 급진전하면 아베 정권의 외교 정책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미·일·호주·인도 등)와 '힘으로 현상을 변경하려는 국가'(중국)로 나누고, 전자가 한데 뭉쳐 후자를 견제하겠다는 게 아베의 외교 정책이었다. 아베 총리는 20일 시정연설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인권과 법의 지배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와 제휴하겠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미·중이 가까워지면 지금까지 '가치 동맹'을 내세워 중국과 각을 세워온 일본의 입장이 어정쩡해진다.

이런 불안감은 일반 국민 사이에도 확산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이 21~2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일 관계가 나빠질 것"이란 응답이 한 달 전 34%에서 56%로 크게 늘었다. "변함없을 것"이란 응답은 45%에서 29%로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