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밤 | 르네 바르자벨 지음 | 김희진 옮김 | 아침이슬 | 352쪽 | 1만3000원
남극 빙하 1000m 아래서 90만년 전 고대 유적이 관측된다. 게다가 정체 모를 초음파까지 발신하고 있다. "내가 여기에 있다. 당신들을 부르고 있다." 곧장 유네스코에서 국제 회의가 소집되고, 발굴 조사가 시작된다. 수직갱을 파고 내려가 역사와 선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나체로 동면 중이던 한 쌍의 젊은 여성과 남성이 발견된다.
시공을 유영하는 1960년대 프랑스 SF소설.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프랑스 SF의 고전이 된 작품이다. 저자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데, 이 소설 역시 영화로 먼저 기획됐다. 낙반과 폭발 등 갖은 고초를 겪으며 빙하를 파고 들어가는 과정을 전 세계에 TV 생중계하는 도입부, 초고도로 발달한 고대 문명 묘사, 발견된 남녀를 소생시켜 신비의 방정식을 복원하려는 국제사회의 갈등과 협력 등의 영화적 연출이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그러나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사랑'이다. 90만년 후 깨어난 아름다운 여성 엘레아와 그녀를 연모하게 된 프랑스 과학자 시몽의 애수(哀愁). 번역기를 통해 언어를 나누고, 서로의 인간적 고뇌를 이해하려는 격정을 SF에선 보기 힘든 서정적 문체로 구현해낸다. "먼저 나는 당신의 입을 보았지. 열린 입의 어두운 구멍을, 그리고 위아래로 보이는 섬세한 치아로 이루어진 거의 투명에 가까운 꽃줄이 당신의 창백한 입술 가장자리로 살짝 드러난 것을. 나는 떨기 시작했어." 과학적 지식 없이도 읽기 쉬운 소프트 SF다. 1968년 프랑스서점협회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