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아련한 향수 가득한 철길과 기차역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을 따라 천천히 풍경을 즐기고 시간이 멈춘 간이역에서 잠시 숨돌리며 올 한 해 다시 뛸 준비를 해본다. 속도를 줄인 채 느리게 걷는 동안 어느새 낭만이 찾아와 발걸음 맞춘다. 색다른 여행지가 되어줄 감성 가득한 철길과 기차역으로 이 겨울 떠나보는 건 어떨까.
철길 걷다 바다 보고, 옛 골목 즐겨
철길 따라 걷다 보면 자그락자그락 자갈 밟는 소리와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뒤섞여 귀를 두드리고, 바다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해운대에서 송정까지 푸른 바다를 끼고 유유자적 산책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 동해남부선 폐철길이다. 동해남부선 복선화로 기존 철로의 기차 운행이 멈추고 나서 산책로로 개방됐다. 미포 건널목에서 옛 송정역까지 4.8㎞에 이른다.
철길의 흔적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해운대와 동백섬, 광안대교는 물론 달맞이고개를 끼고 돌며 삼포(三浦)라 불리는 미포, 청사포, 구덕포의 숨은 풍광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돋이의 장관을 철길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묘미.
이색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철길을 군산에서도 만날 수 있다. 경암동 철길마을. 이름처럼 마을이 철길을 중심으로 길게 뻗어 있다. 이곳 주민들에게 철길은 마당이자 골목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철길은 1944년 만들어진 '페이퍼코리아선'으로 신문용지 제조업체인 페이퍼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이었다. 1970년대 철길 주위로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됐고 2008년 운행을 멈출 때까지 기차는 마을 사이를 지나다녔다.
기차는 멈췄지만 집과 집 사이를 지나는 철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철길을 따라 있는 집들 풍경을 보노라면 1970~80년대로 시간 여행 떠난 기분이 든다. 서울에서 온 대학생 최형수(23)씨는 "철길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정말 이색적"이라고 했다. 이런 풍경은 황정민·한혜진 주연의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의 촬영지로도 스크린에 등장했다. 철길마을에는 이제 사람들이 사는 집은 몇 채 안 남았다.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추억의 간식거리를 맛볼 수 있는 가게와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 찍을 수 있는 사진관들이 속속 등장했다.
서울, 수도권에서 만나는 폐철길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도심에서 폐철길을 즐길 수 있다. 서울 도심 속 힐링 공간으로 대변신한 경의선 숲길이 있기 때문이다. 홍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서자마자 경의선 숲길의 연남동 구간이 나타난다. 도심 속 공원으로 대표되는 뉴욕 센트럴파크를 본떠 '연트럴파크'라는 별칭이 붙었다. 숲과 실개천, 휴식공간이 어우러진 숲길 주변으로 분위기 있는 카페, 레스토랑들이 들어섰다. 경의선 숲길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곳이다.
서울 도심을 관통하며 달리던 경의선 일부 철로가 지하화되면서 남은 철길은 도심 공원이 됐다. 경의선 철길을 활용한 경의선 숲길의 길이는 6.3㎞. 용산구 문화체육센터에서 마포구 가좌역까지 원효동·새창고개·대흥동·염리동·신수동·와우교·연남동 구간으로 나뉜다.
지난해 10월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 와우교 구간에 조성된 경의선 책거리도 개성 만점. 개장 두 달 만에 11만7000여명이 다녀갔다. 책을 테마로 한 거리다. 인문산책, 문학산책, 여행산책, 예술산책, 아동산책, 문화산책, 미래산책…. 책 장르로 이름 붙인 열차 모양 부스에서 책을 판매하고 문화행사도 연다. "여기가 철길이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홍대 앞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여서 더욱 자주 오게 되는 것 같아요." 직장인 김지연(29)씨가 웃으며 말했다. 옛 철길과 시골 간이역 풍경을 재현해 와우교 아래는 포토존으로 인기가 많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기차 여행의 낭만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경춘선이다. 2010년 경춘선 운행이 멈췄지만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경춘선 숲길이 조성돼 옛 추억을 따라 걸을 수 있다. 경춘철교와 육사삼거리까지, 경춘선 숲길 총 6.3㎞ 구간 중 3㎞가 시민에게 개방됐다. 올해 중 3단계 구간 공사가 마무리되면 광운대역에서 육군사관학교 일대까지 경춘선 철길이 도심 공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철길이 일부만 남아있는 경의선 숲길과 달리 경춘선 숲길엔 철길을 그대로 둔 산책로가 많아 경춘선의 추억을 만끽할 수 있다. 경춘철교도 도보교로 만들어둬 직접 걸을 수 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안산으로 떠나 짧은 휴식을 즐기는 것도 좋다. 고잔역에 내리면 눈에 들어오는 좁다란 철길. 수인선 협궤(狹軌) 폐철길이다. 일반 기차보다 작아서 꼬마열차라고도 불린 기차가 달렸던 길이라 철길 폭이 좁다. 수원과 인천을 잇던 수인선의 복선화로 옛 철길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고잔역과 중앙역 사이에 남은 폐철길은 산책로가 됐다. 열차 표지판이나 건널목 흔적이 일부에 남아있어 옛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천천히 걷다 보면 철로에 새겨진 글귀들이 눈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