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논설주간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야당 출신 한 전직 의원이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이 식물이 되고 토요일마다 수십만명씩 모여서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것은 국가 비상사태 아닙니까. 북한의 도발 위협을 언제나 받고 있는 나라에서 이런 국정 공백과 수십만 시위 사태는 아주 심각한 상황 아닌가요. 그런데 이 비상사태를 이렇게 축제처럼 가족사진 찍고 인증 사진 찍고 가수 노래 듣고 간식 사먹으며 즐길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필자는 "경찰이 강제 진압을 하지 않는 데다 시민 의식이 높아져서 그런 것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그는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며 "경찰 진압이 없고 시민 의식만 높으면 우리는 안전한 나라입니까. 지금 북한군이 기습하면 우리 스스로 막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고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러고선 "시위에 나온 사람 중에 북한의 위협을 머리에 떠올려 본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이럴 수 없었을 겁니다"고 했다.

그 정치인의 말대로 '만약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주한미군이 지금 여기에 없다면 대통령의 잘못을 응징하는 과정이 이렇게 평화롭고 자유로울 수 있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문재인 전 대표는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되면) 혁명밖에 없다"고 했는데 시위 군중이 대통령을 강제로 끌고 나와야 한다는 뜻까지 포함한 말이다. 정말 한·미 동맹이 없었다면, 그래서 언제나 휴전선 걱정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아닐 것이다.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제9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공기는 어디에나 있다. 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의식하지 않고 산다. 그런데 없어지면 살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휴전선으로부터 불과 60㎞ 떨어진 서울 광화문에서 포탄에 맞을 걱정은 0.00000001%도 하지 않고서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 소추할 수 있는 것은 안전을 보장하는 한·미 동맹을 공기처럼 숨 쉬고, 물처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나 공기를 고마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야당은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를 재검토한다고 한다. 중국의 이익에 반(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드는 한·미 군 시설과 유사시 미 증원 전력이 들어오는 항만 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동맹국 미국이 아니라 중국 입장을 더 중시한다면 미국이 어떤 생각을 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야당은 집권하면 개성공단도 즉시 재가동한다고 한다. 대북 제재의 구멍을 우리가 만들겠다는 것으로 미국과 합의했던 정책을 뒤집는 것이다. 집권하면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고도 한다. 외교·안보정책이라고 내놓는 것이 한·미 동맹을 해치거나 위태롭게 하는 것뿐인 것 같다. 한·미 동맹 덕에 안보 걱정은 눈곱만큼도 없이 촛불 시위에 편승한 정치인들이 한·미 동맹을 흔드는 언행만 하고 있다.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땅을 자기가 발 굴러 허물어뜨리는 모습이다. 용감한가 어리석은가.

3월24일 서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지덕칠함(PKG)과 미 육군 카이오와 헬기(OH-58) 2대가 한미연합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는 한·미 동맹이 영원할 것으로 안다.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고, 무슨 일을 벌여도 언제나 곁에 있을 것으로 안다. 국제 관계를 자기 눈으로만 보는 습관은 자신을 스스로의 피로 지켜본 적이 없는 나라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야당은 미국이 필요해서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미 동맹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지긋지긋한 6·25에서 발을 빼는 것이 먼저였다. 미국은 한국전이 재발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경우 다시 말려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일본이나 호주같이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가 아닌 한국과 구속력을 갖는 방위조약을 맺는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분위기를 이승만이 때로는 미친 것처럼, 때로는 고집불통으로, 때로는 허를 찌르는 충격적 조치로 바꿔놓았다. 한·미 동맹은 싫다는 미국을 이승만이 억지로 끌어다가 도장 찍게 만든 것이다.

미국의 대외 정책은 한국 정권의 변화에 일희일비하지는 않는다. 한·미 동맹이 지금까지 존속한 것은 이익 동맹이 아닌 가치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발전하면서 미국에 있어 한국은 미국의 대외 정책이 성공한 사례, 미국인이 흘린 피가 보답받은 사례가 됐다. 미국 도움으로 성공한 자유 민주국이 된 한국과의 동맹은 단순한 이익 개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다. 그는 모든 일을 거래와 협상, 이익이냐 손해냐로 본다.

트럼프 이후 한·미 동맹이 기회가 될지, 위기가 될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그가 '가치'가 아니라 '이익'만을 보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한·미 동맹이 더 이상 '물'이나 '공기'일 수 없다는 뜻이다. 공기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그 상황을 맞을 실력, 각오, 전략이 있는가. 없다면 자중(自重)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