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말썽쟁이, 극우 포퓰리스트, 브렉시트 대표주자’

다양한 별명을 지닌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UKIP) 임시 대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의 우정을 자랑하고 있다. 트럼프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운동기간에 패라지를 적극 지지해왔다.

패라지도 화답하듯 미 대선 기간에는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트럼프의 선거 유세를 도왔다. 패라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영국 정치인 가운데 최초로 트럼프와 회동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패라지를 주미 영국대사로 추천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보여줬다.

패라지는 브렉시트 이끈 정치인으로 브렉시트 이후 당수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패라지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는 반이민 정서를 자극해 브렉시트 성공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그는 외교경험이 적고, 막말을 자주 해 ‘영국의 트럼프’라는 평도 받고 있다. 실제로 브렉시트 이후 유럽의회에 참석해 “당신들(유럽의회의원) 중 누구도 평생동안 멀쩡한 일을 해본 적이 없다”고 비난했다.

지난 20년간 패라지의 정치 슬로건은 “나는 내 나라를 되찾기를 원한다”였다. 그는 유럽연합(EU)에서 영국을 빼내려고 노력해왔으며 끝내 브렉시트를 성공시켰다.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알려진 그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EU 회의주의를 이끌어냈다. 패라지는 이민과 EU탈퇴를 주장하며 소수정당이었던 영국독립당의 지지기반을 넓혀왔다.

◆ 나이절 패라지, 유럽연합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영국독립당 창설 멤버로 나서

패라지(52)는 1964년 켄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이 순탄치는 않았다. 증권중개인이었던 패라지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다. 패라지는 5살 때 부모님의 이혼도 겪게 된다.

그렇지만 상위 중산층인 패라지의 가정에 큰 타격은 없었다. 패라지는 영국 사립학교인 덜 위치 칼리지에 다니며 크리켓, 럭비, 정치 토론 등에 흥미를 가졌다. 18살 때 패라지는 대학에 가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 런던으로 가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1982년, 패라지는 런던 금속거래소에서 원자재 관련 트레이더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영국 정치계에 관심을 보이며 영국 보수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존 메이저가 이끄는 보수당이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유럽공동체(EC)를 유럽연합(EU)으로 강화한 조약)에 서명해 유럽공동체 연합을 창설하자 불만을 품었다. 패라지는 이듬해 영국독립당(UKIP)으로 옮겨 창당 멤버가 됐다.

20대 초반 패라지는 목숨을 잃을 뻔한 기회를 몇 번 넘겼다. 21세엔 심각한 자동차사고를 겪었으며 회복된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고환암 진단도 받았다. 이후 자동차 사고와 암 치료를 극복했고 이는 그가 인생을 최대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기회가 됐다.

패라지는 반EU주의자로 알려지며 정치 활동에 집중했지만 초기 영국독립당의 선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영국독립당은 1997년 총선에서는 제임스 골드스미스의 국민투표당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다 국민투표당이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반EU운동을 시작했다.

◆ 영국 국회의원 7번 출마에 7번 낙선한 패라지, 과거 향수 불러일으키며 인기 상승

EU에 대한 반감으로 신당을 창설한 패라지가 목소리를 낸 곳은 역설적이게도 EU의 법을 만드는 유럽의회였다. 1999년 당시 35살이었던 패라지는 사우스이스트잉글랜드를 대표해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2006년에는 영국 독립당 대표를 맡았다.

그는 영국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선거에 출마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패라지는 영국 국회의원 선거에 7번 출마해 7번 낙선했다. 패라지는 2010년 총선에서 존 버커우에 져서 하원의원이 되지 못했고, 2015년에는 사우스타넷 선거구에서 무명의 보수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패라지는 총선 패배 후 대표직 사퇴를 약속했지만 당원들의 거부로 이를 번복하고 자리를 유지하며 브렉시트 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패라지는 최근 직설 화법과 맥주, 담배를 즐기는 평범하고 일반인 같은 이미지로 노년층과 백인, 블루칼라 유권자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패라지는 이민 반대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으며 주거·학교·건강보험 등 다양한 문제를 이민자 탓으로 돌렸다.

거침없는 패라지의 언행은 유권자들에게 강력한 경제와 적은 이민자가 있던 영국의 호황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2014년까지 영국독립당은 영국 하원선거에서 실패를 거듭했지만, 보수당을 꾸준히 공격해 지지층을 빼앗으며 성장했다.

패라지, 브렉시트 타결되자 "할 일 다했다"…당대표 사퇴 후에도 EU 탈퇴 독려나서

보수당을 이끌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영국 독립당을 ‘미치광이·인종차별주의자 정당’이라고 비판해왔다. 캐머런 전 총리는 독립당의 ‘이민자의 수를 줄이자'는 구호가 인종차별적이라고 지적했다.

2013년 캐머런은 기성정당을 위협하는 영국독립당의 기세를 꺾기 위해 총선 공약으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내세웠다. 보수당은 브렉시트 공약으로 인기를 끌며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했다. 당시 영국독립당은 380만표를 얻어 노동당, 보수당에 이어 3위를 차지했지만 개별 선거구에서 단순 최다 득표자를 선출하는 영국의 선거 방식 때문에 1석밖에 얻지 못했다. 140만표를 받은 스코틀랜드 민족당은 56석을 얻었다.

보수당 승리로, 지난 6월 브렉시트 투표가 열리자 패라지는 대중들의 반이민 정서를 집중적으로 자극했다. 패라지는 영국 국민들에게 “터키가 EU에 가입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영국의 영광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영국독립당은 난민 수백명을 배경으로 포스터를 만들어 ‘나치식 선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패라지는 1700만명 이상이 EU 탈퇴에 표를 던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투표로 브렉시트가 결정되자 패라지는 “영국 독립의 날”이라며 뿌듯해했다. 그는 “할 일을 다했다고 느낀다. 더 이상 달성할 것도 없다”며 “이제는 내 삶을 되찾고 싶다”고 당수직 사퇴를 발표했다. 일각에서는 “브렉시트를 이끌어내놓고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는 당대표직에서 물러났지만 EU탈퇴 활동을 완전히 그만두지는 않았다. 패라지는 EU의회 의원직(3선)은 그대로 유지하며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들을 찾아 EU 탈퇴 홍보 투어에 나섰다. 그는 후임인 다이앤 제임스가 선출된 지 18일만에 사퇴하자, 임시대표를 맡았다.

◆ 친트럼프 정치인 패라지, 미·영 관계 이끌까

패라지는 친트럼프 영국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불법 이민자 제한과 보호무역, 강력한 테러대응을 주장한 트럼프와 비슷한 입장이다. 패라지와 트럼프 모두 대중영합주의로 인기를 얻은 셈이다.

패라지는 미국 미시시피에서 열린 트럼프 유세에 참석해 연설하고,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해 트럼프 후보를 칭찬하는 등 트럼프와의 인연을 유지해왔다. 그는 “브렉시트처럼 미국 여론 조사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할 것”이라며 “트럼프가 여론조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트럼프도 “나를 미스터 브렉시트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해 왔다.

실제로 트럼프가 당선되자 패라지는 뉴욕의 트럼프 타워를 방문하며 당선인과의 친분을 자랑했다. 이어 트럼프가 패라지를 주미 영국대사로 추천하자 메이 영국 총리는 “패라지를 위한 공석이 없다”고 당황스러움을 표하며 거절했다.

패라지는 트럼프와 만남을 가진 뒤 트위터에 이를 게시했다.

최근 패라지는 트럼프와 미·영 양자 무역협정을 이끌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양자 무역협정이 EU 등의 권력을 제한할 것”이라며 “유연성 있는 양자주의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측도 “패라지의 생각을 항상 진지하게 듣겠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