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염복규 지음|이데아|416쪽|2만2000원

얼마 전 서울시가 한강에 인접한 압구정동 재건축 아파트 층수를 35층 이하로 제한하자, 한강변에 있는 재개발 대상 아파트 가격이 수억원씩 폭락했다. 그만큼 손해를 본 사람들이 있고, 그전에 미리 팔아 횡재한 이들도 있다.

100년 전에도 도시계획에 따라 손해를 보고 이득을 보는 이들이 있었다. 1911년(명치 44년) 민영린이라는 '백작'이 구리개길(현 을지로) 개발 과정에서 집이 도로에 편입되는 바람에 큰 손해를 봤다. 그는 경성부 토목과의 일본인 공무원에게 접근해 "이번에 내가 손해를 봤으니, 다음 개발 때는 미리 토지를 사두게 해달라. 이익을 분배할 테니 개발 계획만 미리 알려달라"고 했다. 담당 공무원은 남대문~광화문 태평로 공사 계획을 알려줬고, 땅을 매입하려던 과정에서 들통이 나 검찰에 기소된다.

20세기 초입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식민지 수도 경성(京城) 개발이 현재 서울의 '밑그림'을 그렸다. 투기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인간 군상(群像)이나 도시 개발을 놓고 벌어지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정치적 갈등도 지금의 판박이. 당시 광화문과 서대문, 을지로 등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이 지금은 강남과 분당, 송도 신도시 등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 근대(近代)의 구조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다!

도시는 권력자에겐 치적(治績) 홍보 수단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계천 복원이나, 박원순 시장이 주도하는 삼성동~잠실운동장 개발도 같은 맥락.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서울을 근대적 외양으로 바꿔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을 삼으려 했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1910~1945년 일제 강점기의 신문 기사와 도시계획, 각종 구획정리 평면도 등을 제시하며 현재 서울이 형성된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청계천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이었다. 1930년대 청계천변은 악취와 오염이 심했다. 도로는 어른 둘이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아 낙상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주민 대부분이 조선인이라 개발이 되지 않고 있었다. 반면 일본인이 많이 사는 남산 주변 주택지는 달랐다. 일제가 남산 주변을 순환하는 도로 건설 계획을 세우자, 조선일보 등 당시 신문들은 "경성부민에게 필요치도 않은 도로 건설에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 청계천 정비는 게을리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1937년 청계천 복개가 시작된다. 하지만 복개 사업은 다동까지만 덮인 가운데 해방을 맞는다.

일제 치하지만 아직 명맥을 유지했던 조선 왕실과 전주 이씨 종약소의 반대에도, 창경궁·창덕궁~종묘 관통 도로 건설을 일반 시민들이 반겼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배를 가르고 내면(內面)을 들여다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