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방영 중인 MBC 월화드라마 '불야성'에는 여주인공이 두 명 등장한다. '금수저' 이요원이 '흙수저' 유이를 이용해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는 이야기다. 유이가 이요원에게 매혹돼 그를 선망하며 닮아가려 애쓰는 과정이 애틋하게 그려진다.

이 드라마는 '위험하고 치명적인 워맨스'를 홍보 문구로 내세웠다. '워맨스(womance)'란 여자(woman)와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 매우 애틋하고 감정적으로 친밀하지만 성적인 의미는 없는 여자끼리 관계를 뜻한다. 사전에 정식 등재된 영단어 브로맨스(brother+romance)의 여성 버전인 셈. 최근 '불야성'처럼 두 여자 사이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남녀 간 사랑 이야기나 남자들끼리 우정·의리·배신을 주로 다루던 드라마·영화에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는 것이다.

MBC 월화드라마 ‘불야성’의 두 여주인공 이요원(왼쪽)과 유이. 이요원은 유이를 자신의 분신으로 키우고, 유이는 그런 이요원을 동경하며 흠모한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 '미씽'은 엄지원·공효진, 제작 중인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는 김희선·김선아, 내년 개봉 예정인 영화 '여교사'는 김하늘·유인영을 투톱으로 내세웠다. TV 시청자나 영화 관객 중 여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남자 배우가 중심이 되는 작품은 흥행하는 반면 여자 이야기는 실패한다는 고정관념이 조금씩 깨지고 있는 것. 배우 엄지원은 개봉 전 인터뷰에서 "브로맨스는 너무 많이 봐서 지겹지 않은가. 새로운 것을 해볼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간 드라마·영화 속 여자 관계는 연적, 고부간 등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단순하고 적대적인 대립 관계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워맨스 작품에선 주로 대조적인 조건을 가진 여자끼리 만나 질투, 경쟁, 배신, 화해 등의 단계를 거쳐 서로에 대해 깊은 이해를 이루게 되는 과정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룬다. 국내에선 MBC '마마'(2014)를 워맨스의 시초로 본다. 한 남자의 아이를 혼자 키워온 여자와 그 남자의 아내가 갈등 끝에 절대 이뤄질 수 없을 것 같던 우정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가 웬만한 멜로 드라마 못지않게 애틋하고 섬세하게 그려졌다. 본격 워맨스 작품은 아니더라도 작품 속 여주인공과 조연급 친구 사이를 매우 깊고 친밀하게 묘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남자 주인공 여럿을 내세운 작품이나 남녀 간 사랑 이야기만 접해온 사람들이 여자들 얘기를 신선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tvN '미생'에서 직장 동료 간 다양한 우정 관계를 그렸던 김원석 PD는 한 인터뷰에서 "사실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트렌드의 연장선이라고 본다"며 "현실에선 멜로보다 동성 간 우정이 더 자주 느낄 수 있는 감정인 반면 드라마 등에서 많이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미디어 속 페미니즘을 연구한 영국 여성학자 앨리슨 윈치는 "경제적 안정과 행복한 삶을 선물하는 완벽한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판타지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시대"라며 "남녀 간 사랑 이야기를 시시하게 여기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