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본부 정전감실 방위병으로 군 복무하던 시절 중요 업무 중 하나는 '5분 만에 커피 10잔 타기'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해군 간부들은 방위병에게 자잘한 행정 보조 업무만 맡겼다. 해군의 본부이므로 전국 해군 간부들이 회의하러 찾아올 때가 잦았는데, 그때 장교들을 대접할 커피를 빨리 대령하는 것이 방위병 주요 업무였다. '정전감실'은 해군 특유의 명칭으로 해군 정훈 병과 최고 사령부였다.

당시 진해에서 근무하던 유 대위님도 가끔씩 서울 해군본부에 오던 정훈장교였다. 유 대위님은 아무리 많은 손님이 들이닥쳐도 순식간에 커피를 끓여 내놓는 나를 보며 "한 수병, 일 잘하네. 방위는 전쟁 나도 커피 타야 되는 것 알지?"라고 칭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분이었다. 아무 말 없던 다른 장교들보다 살가웠던 유 대위님이 고마웠다.

1년6개월 방위 근무를 끝내고 복학한 뒤 졸업과 동시에 기자가 되었다. 수습기자를 뗀 그해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막내 기자인 나에게 주어진 일은 한강에 떨어진 성수대교 상판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사로 만들어 보내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오던 그날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짧은 기사를 부르고 있는데 한 군인이 내게 우산을 받쳐주며 통화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자 그가 말했다. "해군 UDT 대원들이 오늘 수색작전한 내용을 보도 자료로 만들어 왔습니다. 기사에 반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얼굴을 들어 보니 유 대위님이었다. "어? 유 대위님 아니세요?" "저는 유 소령입니다만…." 그 사이 대위님이 소령으로 진급한 것이었다. "저 본부에서 방위 근무했던 아무개입니다. 커피 잘 탄다고 해주셨던…." 그렇게 말하며 나는 보고야 말았다. 유 대위님 표정이 영화 '길' 마지막 장면 앤서니 퀸처럼 바뀌는 것을.

월간조선 12월호를 보니 현역 군인 중 최장수 정훈장교인 유 대위님이 연말에 준장으로 전역한다고 한다.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사건, 아덴만 여명작전, 세월호 사건을 정훈장교로 치렀다. 유영식 제독님, 전역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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