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초대 금융위원장

"역사는 확률은 낮아도 충격이 큰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 난 적 없다.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들의 동시다발적 돌출로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트럼프 시대의 출범으로 글로벌 패러다임의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가운데, 안보·경제 복합 위기에다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빚어진 국정 붕괴는 대한민국호(號)를 좌초시킨다. 삼각파도에 휩쓸린 배의 선장(대통령)은 리더십을 잃고 선원들(정치권)은 제 살길 찾기에 급급하다 보니 배(나라)와 승객(국민)의 운명은 경각에 달렸다. 가장 심각한 건 엔진(경제) 자체가 꺼져가는 문제다.

요즈음 글로벌 화두는 강력하고 파격적인 리더십의 부상(浮上)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쇼크로 '강한 지도자'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중국 시진핑은 모택동 이후 최강의 핵심 파워를 형성하고 있고, 일본 아베는 장기 집권과 헌법 개정의 기반을 구축했다. 러시아 푸틴은 차치하고라도, 독일 메르켈 총리도 내년도 집권 4선 도전을 선언하기도 했다. 전 세계를 휩쓰는 신(新)고립주의·국수(國粹)주의 확산은 신흥국에 큰 도전이다. 국제사회의 공동 번영보다 각자도생 시대로의 변화를 뜻하고, 역사적 전환점에서 역동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트럼프노믹스(트럼프 경제정책)에 가장 취약한 국가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개혁 실종, 구조조정 올스톱, 정책 표류에 국정 붕괴까지 기막힌 현실이 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소비심리에다 생산·투자·수출 등 각종 경제지표는 추락하고, 금리 인상 조짐은 1300조 가계부채의 경고음을 높이고 있다. 세계 경제 추세에 역주행하는 국회의 법인·소득세 인상 추진 가능성에 한국 경제는 질식 상태다. 대통령 탄핵을 앞둔 내우외환(內憂外患) 속에 나라를 살려낼 국가 리더십의 과제와 자질을 생각해본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5차 촛불집회'가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열린 가운데, 수많은 집회 참가자들이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첫째, 확고한 안보관과 유연한 외교통상 리더십이 필요하다. 트럼프 외교·안보팀은 북핵 해결에 실용적이되 단호한 입장을 견지할 전망이다. 최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은 한·미 동맹 보완 차원에서도 잘한 일이지만, 특히 과도기 정부의 각 부처에 요구되는 적극적 리스크 관리의 좋은 예다. 급격한 국제질서 재편과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글로벌 식견도 필수 덕목이다. 다자간(多者間) 무역협정은 폐기하더라도 양자간(兩者間) 자유무역의 실익을 추구하겠다는 트럼프 당선인 입장을 감안할 때, 한·미 FTA 재협상 요구에 대한 선제적 통상외교 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둘째, 경제 활력을 키울 역동적 리더십이 핵심이다. 정치 표류기에 경제 사령탑은 우선 세워야 한다. 걸핏하면 청와대 회의에 대기업 총수를 부르거나 국정감사·국정조사에 기업인들을 무리하게 불러대는 행태가 개선되어야 기업과 경제가 산다. 금융규제 수준이 낮은 미국에서도 규제 완화를 추진하는 판국에 은산분리 규제에 묶여 인터넷은행 출범이 제대로 안 되는 국내 금융 현실은 안타깝다. "포퓰리즘은 반짝 효과는 있을지언정 지속 효과 없이 부작용만 키운다"는 사실은 오래전 루디 돈부시 MIT 교수 연구 이후 정설이고, 대선을 앞두고 경제의 기본 원칙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구조개혁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과 체력 강화가 정도(正道)다.

셋째, 품격과 신뢰,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이 기본이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진정한 리더십은 솔선수범과 자기희생의 도덕적 권위에서 나오고, 개혁의 동력도 신뢰에서 나온다. 올바른 소통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는 겸손과 포용의 자세에서 출발한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편견은 남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남으로부터 우리를 차단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막말이나 격한 행동이 강한 리더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한 거부감을 만들 뿐이다.

대한민국 미래가 역사적 교차로에 섰다. 최근 사상 최대 규모 촛불시위는 성숙해진 시민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촛불로만 밝히기에는 우리 앞날은 너무 어둡다. "국민을 바라보지 않으면 국민에 의해 망하고, 국민만 바라보면 국민과 같이 망한다"는 경구는 되새길 만하다. 촛불에 담긴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정신을 국가 시스템 대(大)개조로 승화시켜야 한다. 강력하고 역동적인 국가 리더십은 시스템 '리셋'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촛불 민심에 편승한 정치권 당리당략과 개인 이해관계로 국가 거버넌스 개선이라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첫 대국민 사과를 한 지난달 25일이 잘 알려진 노래 '10월의 어느 멋진 날' 대신 대한민국 몰락의 참담한 전조의 날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국민적 분노를 생산적 에너지로 바꾸어야 나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