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서울 지하철 안에서 어떤 서양인 질문에 응대하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는데도 열심히 한국말로 뭔가 말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대화는 이랬다. "광화문에 가려면 어디서 갈아타야 하나요?" "어디 가려고?" "종로3가에서 갈아타는 것 맞죠?" "종로3가는 왜 가는데?" "오렌지색에서 자주색으로 갈아타야 하죠?" "어느 나라에서 왔어?" 어쭙잖은 영어 실력으로 끼어들까 하다가 혼자 킥킥대고 말았다.

미국에 처음 1년 머물 때 성문종합영어로 단련된 실력의 보잘것없음을 한탄한 적이 여러 번이다. 그 시골에 한국인 유학생 2명이 새로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학교 캠퍼스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 2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웨어 이즈(Where is)… 자판기?" 내가 "한국 분이세요?" 하고 물으니 "어떻게 알았어요?" 하고 되물었다.

6·25 전쟁 당시 고 3이었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작파(作破)하고 피란길에 올랐다. 함경도 출신이 거제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미군 부대에서 통역 겸 잡역부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면접 보러 갔다. 한국인 면접관이 물었다. "영어 할 줄 아시오?" "예. 조금 합니다." "'변호사'가 영어로 뭐요?" "로여(lawyer)입니다." "합격이오." 아버지는 그 뒤로 미군 부대에서 일하며 이남에서의 험한 삶을 이어갔다.

영어든 일어든 중국어든, 통하는 재주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며칠 전 지하철 타고 대학로에 가는데 옆자리 아가씨가 말을 걸었다. "아저씨, 명동~." 중국인이었다.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라고 물었더니 그녀가 뭐라고 했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하철은 이미 명동역을 지나쳐 반대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한국말로 "지나쳤어요. 건너편에서 타야 돼요"라고 말해줬다. 그녀가 거듭 인사하며 뭐라고 말했는데 양꼬치엔 칭다오라는 건지 진 땅엔 장화고 마른땅엔 운동화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건너편에 있던 20대들이 나를 보며 킥킥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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