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파 측정 헤드셋을 끼고 안락의자에 앉아 화면을 본다. 화면 속엔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처럼 하얀 공을 축으로 파란 공이 회전한다. 지시에 따라 몸은 그대로 둔 채 정신을 집중해 파란 공이 하얀 공 중심으로 가기를 마음속으로 되뇐다. 몇 분 뒤 두 공이 겹쳐지자 화면에 '자유' '사랑' '욕망' 같은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뜬다. 옆의 다른 모니터에 뇌파 변화가 거미줄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모인 뇌파 정보가 3D 프린터로 넘어가 4시간 정도 있으면 조각이 만들어진다. 프랑스 뉴미디어 기술 작가인 모리스 베나윤(59)이 AI(인공지능)를 이용해 토비아스 클랭, 장 밥티스트 바리에와 공동으로 작업한 작품 '브레인 팩토리'다.
손 하나 까딱 안 했는데 공장에서 제품 찍듯 '감정 조각'이 만들어진다. 전통적인 장르 분류법에 따르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AI 예술'이다.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예술인가, 기술인가. 여기서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16일부터 서울 서린동 SK 본사 빌딩 4층 '아트센터 나비'에서 열리는 '아직도 인간이 필요한 이유: AI와 휴머니티'전(展)은 낯선 전시다.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AI 예술 전시. 느낌표보다는 물음표가 앞선다. 전시 목표는 올봄 '알파고 쇼크'와 함께 갑자기 우리 일상으로 들어온 AI를 들여다보고, 괜한 불안감을 덜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싯 아그라왈(인도), 테렌스 브로드(영국) 등 국내외 작가 15팀이 AI를 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철학책 9권을 학습한 AI가 만들어낸 문장(양민하 '해체된 사유와 나열된 언어')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모호하다. 동물 이미지 수천 장을 학습한 AI(신승백·김용훈 '동물 분류기')는 꼼짝 않고 가지에 앉은 앵무새를 '방부 처리된 동물'로 분류했다. AI가 전지전능한 신(神)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감정을 담아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는 '로보판다', 소음을 취합해 음악을 편곡하는 로봇 '브레맨 음악대'처럼 인간의 마른 감성을 채울 '따뜻한' AI도 있다.
이번 전시는 3년간 연구한 결과물이다. 아트센터 나비는 IT기업인 SK그룹에서 2000년 설립한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융합 예술계의 파워 인사로 꼽히는 노소영 관장이 이끈다. 휴대폰을 이용한 '모바일 아트'를 2000년 초반에 소개하는 등 색다른 예술을 한발 앞서 보여줬다. 그래서 1~2년에 한 번꼴로 가끔 전시를 하지만 파급력이 큰 편이다. 노 관장은 '알파고 쇼크' 이전인 지난해 초부터 로봇 전문 랩인 '나비 E.I 랩'을 이끌었다.
[미디어 아트란?]
"앞으로 인간이 필요하냐고요? 'Yes and more'입니다." 전시에 앞서 만난 노 관장이 말했다. 그는 "AI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아이'다. 이 아이는 '부모'인 인간이 주는 데이터를 먹고 산다. 불량 식품 안 먹이고 앵벌이 하지 않도록 잘 키우는 게 부모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부모라면 아이를 기르면서 비로소 사람이 되는 걸 느낀다"며 "AI를 통해 인간을 다시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AI와 예술의 결합은 일반 관객에겐 생소하다. 전시장은 미술관보다는 과학 체험관 같다. 어리둥절해 할 관객을 향해 전시 협력을 한 세계적인 AI 회사 'IBM 왓슨 그룹' 아르만도 아리스멘디 부사장이 말했다. "달리가 초현실주의 작품을 내놓았을 때 아무도 예술이라 하지 않았지만 훗날 예술사의 기념비적인 명작이 됐습니다. AI 예술 역시 후대에 그런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전시 내년 1월 20일까지. (02)2121-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