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승용차를 몰고 서울의 한 대형마트를 찾았던 임신부 김모(32)씨는 불법인 줄 알면서도 면적이 넓은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에 차를 세웠다. 임신 9개월 만삭(滿朔)의 몸으로 일반 주차구역에 차를 세웠다가는 비좁은 차 틈으로 문을 열고 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날 주차장엔 차가 빽빽이 들어차서 차와 차 사이의 거리가 30~40㎝밖에 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김씨는 "몰상식한 행동으로 비칠까 봐 낯이 화끈거렸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며 "임신부 전용 주차공간을 늘려주든지 아니면 임신부도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할 수 있게 배려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심 다중이용시설의 주차공간은 임신부가 아닌 사람들도 간신히 빠져나올 정도로 비좁은 경우가 많다. 주차공간의 너비를 2.3m로 규정한 주차장법 시행규칙은 1990년에 만들어져 지난 26년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요 국산 중대형 승용차 너비는 1990년대 1.7~1.8m에서 지금은 1.9m 이상으로 커졌다. 주차공간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도 차량 간 여유 공간이 40㎝밖에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임신부를 위한 전용 주차구역은 턱없이 부족해 "주차장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한다"는 임신부들의 한탄이 나오고 있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했다가 과태료를 냈다는 임신부도 부지기수다. 서울에 사는 한 임신부는 "임신부도 장애인 주차구역 주차가 가능한 줄 알고 산모 수첩을 올려 두고 주차했다가 10만원 과태료를 냈다"고 말했다. 임신부 전용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장애인 주차구역에 임신부도 주차해도 되나요?' 같은 문의 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일부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임신부 전용 주차구역' 설치를 독려하고 있지만 실적은 저조하다. 임신부 전용 구역은 안전한 승하차 공간 확보를 위해 일반 주차구역보다 가로 폭을 넓게 만든 것으로, 보통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과 같이 가로 3.3m, 세로 5m 규격으로 만들어진다. 바닥과 벽면에 임신부 구역임을 알리는 분홍색 표지가 들어간다. 주차난이 극심한 서울시의 경우 작년 4월 처음으로 서초구가 구청 주차장의 150개 주차면 중 2면을 임신부 전용으로 설치한 정도다. 서울시 차원의 정책은 전무하다.
지자체가 조례를 제정해도 홍보 및 단속 활동 부재로 실효성이 없는 경우도 많다. 전라북도의 경우 올해 한국여성소비자연합이 조사한 결과 조례 제정 후 공공시설과 다중이용시설 257곳 중 77곳만이 전용 구역을 설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마저도 일반 주차공간과 면적이 동일한 경우가 많아 요식행위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임신부를 위한 전용 주차구역의 설치 근거를 규정한 '장애인·노인·임신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19대 국회에서도 같은 법안이 발의됐다가 폐기됐었다.
임신부 민모(29)씨는 "그나마 있는 임신부 주차구역도 일반인이 얌체 주차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법 마련도 중요하지만 임신부 배려 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가 앞서 이뤄져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자동차 보험업체 KB매직카다이렉트가 '임신부 승하차 공간 확보를 위해 차량 문에서 60㎝ 떨어져서 주차하자'는 캠페인을 벌였으나 일부 네티즌으로부터 '지나친 여성 배려'라며 비난을 받았다. 민씨는 "지하철의 '임신부 배려석' 등 임신부 배려를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나라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