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불멸주의자 |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376쪽 | 1만6000원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알코어(Alcor) 생명연장재단' 건물에는 높이 275㎝의 길쭉한 원통 모양 용기가 여러 개 놓여 있다. 이곳에선 회원들이 죽으면 시신을 원통에 넣고 영하 196도로 통을 유지하기 위해 액체 질소를 주입한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지난 뒤 과학기술이 발달했을 때 시신을 해동시켜 소생시켜 주는 서비스의 비용은 1인당 20만달러. 유명인 중에는 2002년 사망한 프로야구 선수 테드 윌리엄스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인간은 죽음의 문제에 관한 한, 구석기 시대 이후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인식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 불멸(不滅)을 추구한 대열에는 구석기 시대 주술적 매장 풍습이나 진시황의 병마용, 이집트의 파라오, 도교의 신선들, 연금술에 이어 미국 애리조나주의 '냉동인간'들까지 포함된다. 실리콘 밸리에서 정보기술(IT)로 돈을 번 거부(巨富)들조차 막대한 재산을 생명과학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의식'의 탄생과 함께 일상에서 끊임없이 죽음을 상기하게 된 것은 인간만의 비극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시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인간은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영혼'은 인류가 죽음의 공포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인간은 영혼 덕분에 자신을 단순한 육체적 존재 이상으로 인식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회피할 수 있게 됐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신화(神話)나 별자리 등으로 설명되는 '초자연적 우주'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해 왔다. 독일의 분석심리학자 오토 랭크도 "영혼은 저항할 수 없는 심리적 힘, 즉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죽음이라는 불변의 생물학적 사실이 충돌하는 빅뱅 속에서 탄생했다"고 말한 바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과 삶’(1910년). 그림 속 인물들은 죽음에 눈감은 반면 죽음은 이들을 본다. 삶은 끊임없이 죽음을 상기시킨다는 역설.

우리는 문화를 통해, 자신이 이룬 업적이나 알아 왔던 사람들, 무덤에 세워진 묘비, 예술 작품을 통해 '상징적으로' 존속할 수도 있다. 밀란 쿤데라만 해도 소설 '불멸'에서 아는 이들의 기억에 남는 '작은 불멸', 모르는 이들 기억에 남는 '큰 불멸'을 이야기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일찌감치 '에로스와 문명'에서 "문화에 의해 강요된 억제야말로 죽음이 갖는 공격성과 파괴성을 막아준다"고 갈파한 바 있다.

박사과정에서 만났던 실험사회심리학자인 세 명 저자의 공로는 인간의 일상 활동 전체가 사실상 죽음에 대한 공포의 영향권에 있음을 입증한 데 있다. 이들은 25년간 500명 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예를 들어, 1987년 애리조나주 투손의 지방법원 판사 22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자신의 죽음을 연상해본 판사들은 성매매 용의자들에게 그렇지 않은 판사들보다 훨씬 높은 보석금을 선고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 실험집단에 죽음을 떠올리게 한 후 실시한 가상 주지사 투표에선 차분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후보보다 강력한 확신을 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후보의 표가 8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젊은 계층이 패션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죽을 때가 머지않은' 중·장년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도 한다. 이를 토대로 저자들은 "한 사회의 문화적 세계관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질서와 의미, 영속성을 부여하고, 인간은 한 문화권 내에서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자존감을 통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육체적 존재가 아닌 영속적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죽음의 불가피함은 "인간을 고귀하게도, 비천하게도 만드는" 양면성(兩面性)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문화적 세계관이 흔들리고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사람들은 다른 집단을 비하하고 공격하고 말살시킴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 한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 난사 사건을 저지른 조승희조차 자신의 유서와 육성(肉聲)이 담긴 영상을 방송국인 NBC에 보내 불멸을 추구했다. 규모가 달랐을 뿐, 히틀러 역시 조와 같은 부류였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미국 대선 후보 트럼프가 보여주는 증오의 언사, 난민 문제로 촉발된 영국의 브렉시트,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등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무너지는 격변기에 존재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