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통째 남의 나라에 뺏겼다. 잠시 숨 돌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조국이 두 동강 났다. 인류가 만들 수 있는 비극의 최대치가 한반도로 굽이치던 때, 우리 화가들은 두 줄기로 나뉘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화폭에 거칠게 쏟아내는 부류와 내면으로 삭이고 붓으로 걸러내 정제하는 부류였다. 이중섭(1916~1956)이 전자에 속하는 작가라면 유영국(1916~2002·사진)은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 작가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동갑내기이자 일본 도쿄의 예술학교 '문화학원' 선후배(유영국이 2년 선배) 사이인 두 사람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바통을 주고받았다. 지난 넉 달간 이곳에서 열렸던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 이어 '유영국, 절대와 자유'전이 4일 개막한다.

유영국은 일반인들에겐 이중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지만 미술계 안에서는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로 존경받는다. 드물게 처음부터 추상(抽象)을 시도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유영국은 일본 유학 시절 자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면서 김환기와 함께 한국 역사상 최초로 추상화를 시도한 작가"라고 했다. "아버지께선 학교 선생님이 아버지 직업을 물으면 '모던아트 하신다'고 하라셨어요. 못 알아듣는다니 '아방가르드'라 얘기하라셨는데 아무도 이해를 못 했죠." 장남 유진(66·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씨가 일화를 꺼내며 웃었다. 유영국은 1950년 전쟁둥이인 장남에게 '북으로 진격(進擊)하라'는 뜻을 담아 진(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말이 없어 좋다." 평소 말 없던 유영국에게 추상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한 답이란다. 그는 인간의 모든 비극은 말(言)에서 비롯되기에 시끄러운 세상 소음을 꺼버리고 고요를 담았다.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신조형주의' 사조를 들고 나와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는 면과 선으로 평온한 세상을 추구했던 몬드리안처럼.

공중에 매단 가벽에 유영국이 1967년 그린 추상화(오른쪽)가 걸려 있다. 붉은 삼각형일 뿐인데 가슴에 남는 건 단풍 덮인 가을 산이다. 유영국은 ‘서양과는 다른 추상화’의 열쇠를 우리 자연으로 봤고, 그에게 우리 자연은 고향 울진의 산이었다. 전시장 디자인에 참여한 건축가 김종성씨는 그림의 울림을 강조하기 위해 가벽을 띄우고 곳곳에 여백을 뒀다.

[[키워드 정보] 아방가르드 예술이란?]

'유영국의 시간'을 따라 전 생애에 걸쳐 10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중심축은 1960년대 작품이다. 유영국은 1943년 태평양전쟁 때 귀국해 고향 울진에서 어부로, 양조장 주인으로 10여년을 보냈다. 수완도 좋았다. 양조장 할 때 '망향(望鄕)'이란 이름의 소주를 만들었다. 실향민 어부들이 '망향'을 들이켜며 향수(鄕愁)를 달랬고, 그 술값은 유영국의 그림 밑천이 됐다. 1955년 나이 마흔에 "금산도 금밭도 싫고 나는 그림이 좋다"며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화업을 시작했다.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등 미술단체를 이끌다가 1964년 "그룹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내 그림으로 승부하겠다"며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첫 작품이 팔린 게 1975년, 예순 때였다. 유영국은 "예순까지는 기초 공부 '좀' 했노라" 말했다.

"외국 사람이 그릴 수 없는 한국의 추상화를 그리고 싶다"고 되뇌었다. 노랑·빨강·파랑 원색을 입은 삼각형·동그라미·사각형이 화면에 펼쳐진다. 강렬한 색감과 형태가 눈을 사로잡지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표정이 보인다. 붉게 물든 가을 산이, 녹음 우거진 수풀이, 바다를 삼킨 한가위 보름달이. "아버지가 고깃배 타고 바다에서 빛을 많이 탐구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의 그림엔 빛이 늘 반짝입니다." 아들이 말했다.

유영국은 오래 앓았다. 1977년 심장박동기를 달았다. 세상 뜨기까지 뇌출혈 8번, 입원만 37번 했다. 투병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아내 김기순(96)씨는 "전쟁 겪느라, 어부 하느라 남들보다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많다며 그 시간 메우려 정말 열심히 작업했다"고 했다. 묵묵히, 끈질기게 그린 그림들이다. 세상 소음 많은 요즘, 어느 때보다 와 닿는 '말 없는' 그림들이다. 내년 3월 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