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배병우(66)의 파주 헤이리 작업실 뒤뜰엔 울긋불긋 가을옷 갈아입은 나무가 가득했다. 화살나무, 산벚나무, 대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나무 찍어 벌어먹고 살았는데 나무한테 잘해줘야죠."

[험준한 대관령을 누비며 한 컷 한 컷 공들여 찍은 새로운 사진 작품 ]
정작 배병우의 오늘이 있게 한 소나무는 없다. "심으려면 진짜 제대로 된 놈 데려오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허허." 뒷문 앞에 사료 담긴 밥그릇 네 개가 눈에 들어왔다. "길고양이들 밥이에요. 오며 가며 먹으라고."

40여년 산에서, 들에서 뒹굴며 사진 찍은 배병우다. 그 세월 동안 '자연'이라는 스승은 그에게 넉넉한 마음 씀씀이를 가르친 모양이다. 제28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오는 8일부터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여는 수상 기념전에서 카메라로 만난 스승 '자연'을 펼쳐놓는다. 전시에 따로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이 나이에 상(賞) 받는 게 머쓱합니다. 그저 해온 것, 걸어온 길을 담담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가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 여기는 작품 중에서 대표작 15점을 건다. "소나무가 아버지라면 바다는 어머니"라는 그에게 소나무는 곧 경주고, 바다는 곧 제주다. 경주에서 찍은 소나무, 제주에서 찍은 오름과 바다가 반반씩 걸린다.
회심의 카드가 있다. 안쪽 작은 전시실에 걸리는 '암흑 속 소나무'다. 전시실을 깜깜하게 만들고 양쪽 면에 설치한 소나무 사진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러면 소나무가 은은하게 빛을 머금어, 마치 그가 소나무를 찍는 무렵인 동틀 녘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풍찬노숙(風餐露宿) 끝에 이른 새벽 소나무 밭에서 찰나의 빛을 만나는 순간을 관객들은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지난해 9월부터 지난 4월 프랑스 샹보르 성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시작해 국내에선 처음 선보이는 전시 기법이다.
애써 그는 상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지만 '이중섭'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는 건 피할 수 없는 듯했다. 16년 전 얘기를 꺼냈다. 일 년 가야 눈(雪) 한 번 볼까 말까 한 여수 촌놈이 눈에 빠져 있을 때였다. 눈발이 날리자 카메라 들고 가평 유명산으로 향했다.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눈길에 미끄러졌다. 가드레일을 넘어 몇 바퀴 돌아 차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정신을 잃었다가 몇 분 뒤 눈 떠보니 바위에 차가 걸려 있었다. 차는 다 찌그러졌는데 몸은 멀쩡했다. 자동차 지붕에 있는 선루프로 겨우 빠져나와 트렁크에 있던 카메라로 사고 현장을 찍었다.
"사고 나기 한 해 전 세상 떠난 아내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은 나 따라 하늘나라 오지 말고 남아서 사진 찍고 애들 돌봐 줘요.'" 대학 동기에 생일마저 같은 아내는 "당신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도록 돕겠다"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 사건은 덤으로 얻은 인생을 오로지 사진에 전력투구하는 계기가 됐어요."
'이중섭상'은 그의 사진 인생에 잊지 못할 두 번째 '사건'이다. "엊그제 술자리에서 후배들이 그래요. 이중섭이 20년 더 살았으면, 김환기가 10년 더 살았으면 어땠을까 해요. 저는 이미 오래 살았고, 그런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작업해야겠다 싶더군요." 그는 "이중섭상이 새 출발점이 돼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작업해서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몇 개라도 작품으로 남았으면 한다"며 스튜디오에 세워둔 오래된 대형 '뷰 카메라'(주름상자가 달린 카메라)를 만졌다. 중형 파노라마 카메라를 주로 쓰는 그는 조만간 이 커다란 카메라를 짊어지고 나가 소나무를 찍을 거란다.
"난 사진과 미술을 떠도는 방랑자… 숲이 작업실이지"
"나는 사진과 미술, 집과 숲, 선생과 작가 사이를 떠도는 방랑자요. 이런 떠돌이 인생한테 상은 무슨 상. 허허."
파주 헤이리 작업실로 향하는 자유로 위에서 '소나무 사진가' 배병우(66)가 머쓱해 했다. 7년 동안 35만㎞를 누빈 덩치 큰 '애마(愛馬)' 운전대를 감싼 손이 두툼했다. 40년 넘게 이 투박한 손가락으로 새끼손톱보다 작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찍고 또 찍었다. 그 땀이 모여 올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88년 상이 제정된 이후 사진가가 수상하기는 처음이다.
이름 석 자는 낯설어도 밑둥치만 찍은 배병우표 소나무 사진은 문외한이라도 봤음 직할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수묵화 같은 사진으로 한국미를 표현해낸 그에겐 "국내에서 취미나 기록 차원에 머물러 있던 사진이 현대 예술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견인차 구실을 한 작가"(사진심리학자 신수진), "자연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등신대(等身大)로 우리 앞에 보여주는 작가"(일본 평론가 지바 시게오)라는 평이 따른다.
작업실 입구에 들어섰다. 소나무 사진으로 둘러싸인 1층 가운데에 파란 탁구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진 아래 신발장엔 운동화 24켤레가 빼곡하다. 고등학교 때 유도 선수까지 해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단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자'다. 배병우의 진짜 작업실은 숲이요, 바다다. 그에게 붓인 카메라를 짊어지고 새벽녘 솔향 농익는 순간 마주하려 풍찬노숙(風餐露宿)마다치 않는다. 줌도, 디지털카메라도 쓰지 않는다. 대신 온몸 근육을 움직여 '수동 줌'을 한다. 몸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신뢰한다. 생선장수였던 아버지의 삶이 보여준 가르침이다.
출세작이요, 분신 같은 소나무 사진은 30대 초반 시작됐다.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간송미술관 전시를 빠짐없이 갔어요. 거기서 겸재 정선 그림을 봤는데 겸재 그림 100점 중 99점에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고 소나무로 만든 관에 묻혀 땅으로 돌아갑니다. 소나무가 바로 한국인이었지요."
1983~1984년 2년 동안 설악산부터 한라산까지 전국의 소나무를 찾아 나섰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소나무에 매료돼 소나무를 평생의 피사체로 삼기로 결심했다. "처음 소나무를 찍는다 했을 때 그 흔한 걸 왜 찍느냐, 미쳤다 했지요. 스승이었던 이대원 선생과 친분 있던 유덕형(서울예대) 총장 두 사람 빼고요."
1993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소나무전'으로 '소나무 작가'라는 별칭을 얻게 됐지만, 미술가로서 배병우의 진가를 알아본 건 일본이었다. 1995년 일본 미토미술관, 1996년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초대됐다. "국내에선 미술계에서 사진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일본에선 미술의 영역으로 내 작품을 봤다"고 했다.
한국의 감성으로 찍어낸 배병우의 사진은 사진 본고장 유럽에서도 인기다. 2005년 가수 엘턴 존이 '포토런던'에서 그의 사진을 1만5000파운드에 사갔고, 폴 매카트니가 배병우 사진을 사려고 들렀다가 팬들이 몰려와 피신한 사건도 있었다. 배병우는 "사진을 일컫는 '포토그래피'란 단어는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라며 "'빛 그림'으로 문화적 다리가 되는 게 나의 꿈이자 예술가로서의 책무"라고 했다.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