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 : 미국의 대 아시아 외교기조)가 두테르테라는 벽을 만났다.
로이터 통신은 20일(현지시각)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동시에 중국과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미국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사흘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 지난 20일 베이징에서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과의 70년 군사동맹을 폐기할 수 있으며, 미국과 군사 협력을 줄이겠다”고 말했다. 또한 “이제는 (미국과) 작별을 말할 시간”이라며 “워싱턴에서는 모욕만 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임기 내 미국 방문 가능성을 일축했다. 나아가, 중국 및 러시아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할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다.
두테르테의 이러한 기행은 70년간 유지된 미국-필리핀 동맹에 균열을 내고 있다. 또한 중국을 견제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기조인 ‘피벗 투 아시아’도 타격을 입었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최근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이다. 아키노 전 대통령 시기 체결된 이 조약은 중국의 팽창을 막는 미 태평양 전략의 핵심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막말에 대해 조심스럽게 반응해 왔다. 익명을 요구한 미 정부 관계자는 “전쟁까지 가는 상황은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미국 관계자 역시 “두테르테는 중국을 상대로 우리를 속이는 게임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미국을 비판하는 이유는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미국의 비판적인 반응 때문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마약 소지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사살하겠다는 공약을 통해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반면, 미국은 정당한 절차 없는 처형은 인권을 침해한다는 입장이다.
미 의회의 입장은 강경하다. 민주당 상원의원 패트릭 리히를 비롯한 의원들은 마약 소지자들의 처형이 계속된다면 필리핀에 대한 원조를 원점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나아가, 필리핀이 인권에 대한 미국의 우려에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면 미 정부는 필리핀에 대한 군사 원조를 중단하거나 마약 살인 혹은 신중한 법원 판결을 요구하는 대표단을 파견하는 방법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커트 캠벨 전 미 국무부 차관보 역시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거대한 문제의 전조들”이라며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킬비 국무부 대변인은 20일 “그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내뱉은 분리 선언이 확대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당황스러운(baffling)’, ‘설명하기 어려운(Inexplicably at odd)’ 등의 단어를 사용하며 비판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외교적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다니엘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는 이번 주말 마닐라를 방문한다. 미 국무부는 러셀 차관보가 필리핀의 입장을 명확히 듣고 올 것이라 밝혔다.
요동치는 듯 보이지만, 정작 미국-필리핀 관계는 고요하다. 두테르테의 ’분리 선언’ 이후에도, 필리핀 당국은 합동 군사 훈련을 취소하지 않았다. 또한 동맹 관계에 대한 어떠한 개정 요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한편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국의 인권 우려에 대해 분노와 막말로 대응했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개XX(Son of Bitch)와 ‘지옥에나 가라(Go to Hell)’라며 막말을 퍼부었다. 76%에 달하는 국정지지도 역시 막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상태다.
정작 필리핀 당국자들은 난처한 상태다. 미국의 원조 없이 국가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러시아와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머레이 히버트 국제전략연구소 남동아시아 프로그램 부국장은 “두테르테는 단지 막말의 장벽을 허물고 싶을 뿐”이라며 “미국이 두테르테를 자극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