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0일 오전 8시 서울중앙지검의 검사와 수사관 240여명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신격호 총괄회장 집무실과 롯데 정책본부 등 17곳을 압수수색했다. 재계 5위 롯데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의 신호탄이었다. 그로부터 132일째 되는 19일 검찰은 "롯데 총수 일가(一家)와 계열사에서 찾아낸 범죄 혐의액이 3755억원에 이른다"고 수사 결과를 밝혔다.

검찰은 신격호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등 총수 일가 5명을 기소했다. 재벌 기업 수사를 통해 총수 일가가 5명이나 동시에 재판을 받게 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검찰은 "심각한 수준의 기업 사유화·사금고화 행태 등 불투명한 재벌 지배 구조의 폐해를 확인했다"며 "기업 활동의 지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효율적·집중적 수사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법조계의 평가는 이 같은 검찰의 입장과 사뭇 다르다. 검찰은 롯데 총수 일가 5명을 포함해 롯데 임원 등 24명을 재판에 넘겼다. 그중 9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신동빈 회장 등 6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롯데홈쇼핑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 수사'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강현구 롯데홈쇼핑 사장, '200억원대 소송 사기 혐의'를 둔 허수영 롯데케미칼 사장의 구속영장도 기각됐다.

◇'효율적으로 수사했다'는데…

검찰 관계자들은 수사 초기부터 "내사를 충분히 했기 때문에 수사가 길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10개월간 진행된 포스코, KT&G, 농협 등 대기업 수사가 늘어지면서 받았던 비판을 의식한 말이었다.

검찰이 이번 수사에 투입한 인력은 서울중앙지검의 3개 부서, 검사만 20여명에 달했다. 첫날 압수 수색 때는 서울중앙지검 수사관의 3분의 2가량인 240여명이 투입됐다. 최근 몇 년 새 검찰이 단일 수사에 투입한 최대 인력이다. 압수 수색은 10여 차례나 반복됐다. 수사받은 사람은 400명이 넘고, 조사 횟수로 치면 720차례에 달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지난해 포스코 수사와 비교하면 기간은 4개월로 단축됐지만, 검찰이 쏟아부은 물량(수사 인력 등)에 비춰보면 짧은 기간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비자금 수사에서 증여세 탈세 수사로

검찰 관계자들은 수사 착수 당시 '총수 비자금'이 수사의 타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19일 검찰이 자료를 발표하면서 '롯데 비리'의 최대 혐의로 꼽은 것은 신격호(94) 총괄회장의 증여세 포탈 혐의였다. "비자금을 쫓다가 난관에 부닥쳤고, 성과(成果)에 쫓기다가 탈세 수사로 방향을 튼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신동빈(61) 롯데그룹 회장이 19일 오전 서울 소공동에 있는 본사로 출근하고 있다. 132일간 롯데그룹 경영 비리를 수사해온 검찰은 이날 신 회장을 비롯한 총수 일가를 불구속 기소했다.

[신동빈 롯데회장 불구속 기소… 검찰 4개월 수사 허무한 결말]

수사팀은 또 몇 차례 확인되지 않은 범죄 혐의를 언론에 공개했다가 체면을 구겼다. '비밀 금고 소동'이 대표적이다. 검찰은 수사 착수 사흘 만인 6월 13일 신격호 총괄회장의 금고에서 현금 30억원과 비밀 장부를 찾아냈다고 가자들에게 브리핑했다. 그러나 롯데 측이 "신격호 회장 등이 연간 합법적으로 지급받는 급여와 배당이 수백억원에 이른다"고 반박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검찰의 수사 발표 자료에는 '비밀 금고' 얘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검찰의 특별 수사는 붕괴(崩壞) 일보직전"

'요란한 출발→부실한 수사 결과'로 이어진 검찰의 기업 수사 패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년 내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수사한 포스코, KT&G, 농협 수사 때도 특수부 수사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 수사에선 일부 계열사 관계자들만 처벌받거나 검찰이 기소한 핵심 인물들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지방의 검사장은 "최근 검찰의 특별 수사는 내사(內査)를 통해 수사 단서를 축적해 나가는 게 아니라 일단 압수 수색부터 해놓고 단서를 잡으려 한다"며 "'털면 뭐든 나오지 않겠느냐'는 수십 년 전 수사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검사들이 인사에 목을 매면서 수사 전문가들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