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처지고 사는 의욕이 바닥일 때 이 사람 영화를 봤어요. 새 작품을 처음 볼 기회인데 당연히 밤새 기다려야죠."
부산국제영화제 3일 차인 지난 8일 해운대 영화의전당 거리는 밤바람이 차가웠다. 야외극장에서 독일 판타지 영화 '하트 오브 스톤'을 보고 나오는데 매표소 앞에 줄지어 앉은 이들에게 눈길이 갔다. 일본 애니메이션 명장(名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으로, 이튿날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나는 '너의 이름은'의 입장권을 사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부산 서면에 사는 여대생 수민(22)씨도 담요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수민씨는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심야 영화 본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밤에만 영화 팬 300여명이 영화의전당 안팎 매표소 세 곳에서 다음 날 아침 표 팔기를 기다리며 밤을 새웠다. 신카이 감독의 팬들은 '위플래쉬'(2014)를 만든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신작 '라라랜드'를 보려는 이들과 밤새워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7년째 영화제에 온다는 한 20대 청년은 "부산영화제는 한국은 물론 세계 최초 상영작이 많아 영화 팬들에겐 꿈 같은 기회"라고 했다.
부산영화제는 16일 폐막 뒤 관객 16만5149명이 올해 영화제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작년 관객 22만7377명에 비하면 6만여명이 줄었다. 하지만 올 영화제가 처했던 악조건을 돌아보면 16만여 관객은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다이빙벨' 상영으로 촉발된 영화제 독립성 공방 이후 영화인 비대위에 참여한 아홉 단체 중 네 곳은 불참 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감독조합과 프로듀서조합의 보이콧 여파가 컸다. 이들이 안 오니 톱스타 배우도 줄었다. '밀정' '곡성' '아가씨' 등 공식 초청작도 감독과 배우가 모두 불참했다. 청탁방지법 눈치 보느라 기업 후원이 끊겨 영화제 최대 볼거리인 '스타로드' 레드카펫 행사도 무산됐다. 예전엔 초청받아 오던 공공 기관과 학계 종사자 상당수도 숙박비와 항공 요금 지원을 받지 못하자 부산행을 포기했다.
이런데도 영화제를 지킨 16만여명은 '골수 영화 팬'일 것이다. 올해도 관심 가는 작품 표를 구하려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매진됐는데요'였다. '칸의 황태자'자비에 돌란 감독 작품 '단지 세상의 끝' 등 화제작을 볼 땐 기자도 상영관 앞에서 취소 표가 나오길 기다리며 줄을 섰다. 레드카펫 노출 드레스 안 봐도, 유명한 감독·배우 오지 않아도 정말 영화를 향한 16만여명의 사랑이 여전히 해운대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진짜 힘은 이런 관객으로부터 나온다. 부산시도, 영화제 측도, 올해 영화제를 보이콧한 영화인들도 관객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서로를 향한 손가락질은 거두고, 여러 명분과 의리도 잠시 눌러 두면 좋겠다. 다시 대화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노력을 보고 싶다. 올해 같은 기적을 또 기대할 수 있을까. 밤잠 포기하고 영화제를 지켰던 진짜 영화 팬들 마음마저 돌아선다면 그땐 정말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