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부는 지난 5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권은주(39) 아식스 러닝클럽 감독은 갈색으로 물들인 커트 머리에, 멋스러운 가죽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예전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가 웃으며 "벌써 19년이 흘렀네요"라고 했다.

은주씨 몰라보겠어요 - 1997년 춘천마라톤에서 한국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던 권은주(39) 아식스 러닝클럽 감독이 당시 받았던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권 감독은 현재 여자 마라톤 한국 기록(2시간 26분 12초) 보유자다. 스무 살이던 1997년 풀코스 데뷔 무대인 춘천마라톤에서 우승하며 세운 기록이다.

당시 결승선 옆에서 자신을 응원하던 외할머니,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권 감독이 눈물을 흘리며 골인 지점을 통과하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땐 정말 앞만 보고 달린 기억밖에 없어요. 우승하고도 '내 기록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니까요."

그는 하루아침에 국내 최고 여자 마라토너에 올랐다. 고향 마을(경북 문경) 입구엔 플래카드가 내걸렸고 운동하는 걸 반대했던 아버지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 동네잔치를 열었다.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혜성처럼 등장했지만 이후 권 감독은 부상에 시달렸다. 그렇게 4년간 심한 부침을 겪고 재기한 곳도 춘천마라톤이었다. 2001년 대회에서 두 번째 우승 트로피(2시간 31분 33초)를 들었다. "당시 컨디션이 정말 안 좋았는데 20㎞ 지점을 넘으면서 힘이 나더라고요. 제게 '고향' 같은 곳이라 그런지 편한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권 감독은 춘천마라톤의 가장 큰 매력으로 '지루할 틈 없는 코스'를 꼽았다. 그는 "호수와 나무가 어우러지는 경치를 배경으로 달리면 빌딩 숲을 뛸 때보다 힘이 솟는다"며 "춘천 코스는 고향 마을처럼 푸근하다"고 말했다. 선수 시절 두 차례 우승을 안으며 춘천마라톤과 인연을 맺은 권 감독은 은퇴 후엔 해설위원, 동호인 클럽 지도자로 춘천을 찾았다. 70주년을 맞는 올해 대회에도 그는 아마추어 러너들과 10㎞ 코스를 달린다.

권 감독에게 19년째 깨지지 않은 한국 신기록에 대해 물었다. "어찌 보면 비극이죠. 솔직히 예전엔 영원히 깨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저를 뛰어넘는 선수가 하루빨리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눈앞의 성적에 목매지 않고 달리는 것 자체에 재미를 붙이는 게 중요한 것 같다"며 "그래야 더 멀리, 더 오래 뛸 수 있다"고 했다. 여자 마라토너로서 삶에 후회는 없을까. 권 감독은 "한창 예뻐 보이고 싶은 20대 때 항상 피부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던 건 조금 아쉽다"며 웃었다.

스무 살이던 1997년 춘천마라톤에서 결승선을 끊으며 울먹인 권은주. 마라톤 데뷔 무대였다.

그는 "하지만 마라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인생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권 감독은 최근 아식스코리아 스포츠마케팅 팀장이 됐다. 그동안 경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영원한 마라토너'이고 싶다는 권 감독은 춘천마라톤 우승 20주년을 맞는 내년 대회 때 풀코스에 도전하기로 했다. 풀코스를 온전히 달린 건 6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제 마라톤 인생의 출발점이었던 춘천마라톤이잖아요. 이왕 뛰는 거 제대로 준비해서 멋지게 완주하고 싶어요."

협찬: SK 텔레콤, asics, 신한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