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노동자 시절부터 남보다 생산성 10배 빨라… 20년 간 22편 영화 만들며 세계 3대 영화제 석권
"내 작품 3편 이상 보면 변태, 사이코라는 말 못할 것"
"홍상수 영화 좋아하지만, 세련된 영화 만드는 건 나하고 안 맞아"
남북한의 긴장을 그린 개봉작 '그물'...'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영화의 기본 자세를 공장 노동자 시절에 배웠다는 김기덕 감독.

1902년 마술사 출신이던 조르쥬 멜리어스는 최초의 SF 장르라고 할 수 있는 ‘달나라 여행'을 만들었다. 달이 윙크하는 모습을 담은 그 귀여운 활동 사진이, 지구에 도착한 최초의 ’오락' 영화였다.

이후 영화는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춘 할리우드 산업의 총아로, 2차 대전 직후 황량한 풍경을 담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으로, 유려한 지적 전통을 추구하는 1960년대 프랑스 누벨 바그로, 여러 시기를 거치며 점점 진화했다.

한국 영화의 시작은 1926년에 만들어진 나운규의 ‘아리랑’이다.

물론 이런 사실은 머리만 아플 뿐, 지금 우리가 영화를 즐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독 김기덕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화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어느 날 문득 영화계에 뛰어 들어왔다. 어쩌면 체계적으로 훈련된 아카데믹한 영화계 사람들에게 김기덕은 등장부터 ‘이물질'같은 존재였다.

아이러니한 건 그토록 긴 가방끈을 매고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한 감독들이 지금 오락 영화를 만드는 데 비해, 김기덕은 여전히 가장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거다.

단도직입적으로, 국졸 학력에 청계천 노동자 출신 감독 김기덕의 영화 생산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통상 충무로의 보통 감독이 잘해야 2~3년에 한 편 정도를 만드는 데 비해, 그는 20년간 22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심지어 ‘실제상황'이라는 영화는 3시간 20분 만에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항상 그가 정해진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승차권을 들고 기차역을 향해 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 기차를 놓치면 인생이 영영 끝날 것처럼. 첫 영화 ‘악어' 촬영 현장에서 배우로 참여했던 조재현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작자에게 구타를 당했는데, 그 억울한 상황에서도 김밥을 씹으며, 시간을 아껴 다음 장면 레디 액션!을 외치더라고요. 언젠가는 대단한 감독이 되겠구나 했어요.”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1996년 ‘악어'로 시작해서 ‘야생동물 보호구역' ‘수취인불명' ‘섬' 등등 초기 김기덕의 영화는 제목만 들어도 괴기스러울 정도로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경향을 드러내면서 관객들과 평론가들을 긴장시켰다.

그는 마치 죄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한 끔찍한 괴로움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처럼 보였다.

관객이 아무리 ‘괴롭힘을 당하는 주인공을 원하지 않는다’고 고개를 돌려도, 그는 줄기차게 ‘고통을 목격시키고 고통을 사색할 것'을 요구했다. 매춘부, 부랑자 등 자본주의의 뒷골목에 버려진 쓰레기 같은 인생에 영혼을 불어넣으며.

그것은 참으로 기나긴 싸움이었다. 그리고 끝내 한국의 그림 같은 사계를 담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년)'을 시작으로, 원조 교제 소녀들의 숭고한 우정을 보여준 ‘사마리아', ‘빈집', ‘피에타'에 이르러 가장 아름다운 영화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점점 더 유연해지는 김기덕 감독. 언젠가부터 반골 기질 가득한 뒷골목 아웃사이더 같은 외양에서 구도자적인 외양으로 변모했다.

어느 가을 저녁, 김기덕을 만났다. 남북한을 오가며 고초를 당하는, 한 북한 어부의 일주일을 담은 영화 ‘그물'이 개봉을 앞둔 채였다.

질끈 묶은 흰머리에 생활 한복, 침묵의 참선이나 선문답이 어울릴듯한 차림새였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1분 1초, 단어 하나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밀도 높은 인생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시간을 쪼개 쓰는 그 알뜰함과 어마어마한 집중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머리 쓰는 지식인 주인공을 거의 보기 힘듭니다. 몸으로 깨달아가는 영화가 대부분이지요?

“제가 살았던 시간이 노동의 시간, 자연의 시간, 야생의 시간이었으니까요.”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 영화제 대상을 받고서 “15살 때 청계천에서 구리 상자 나르던 것이 생각난다”고 했던 말씀이 문득 기억나는군요.

“그곳이 ‘피에타’의 배경이었고, 제 십 대의 삶 대부분이 거기서 노동을 했던 시간이었으니까요. 한국 사회에서 공장 노동자로 살던 사람이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서 대상을 탄다는 게 굉장히 대비되는 상황이잖아요(웃음).”

-데뷔작 ‘악어'에서는 한강의 시체를 팔아 먹고사는 야생의 노동자가 주인공이었고, 이후 ‘파란 대문'이나 ‘섬'도 몸을 팔아 사는 매춘 여성이 주인공이었어요. 초기작에서는 그 육체성이 불편했다가, ‘사마리아' 이후부터는 그 육체가 점점 정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영화 입문 자체가 다른 감독들과 많이 달랐어요. 다른 분들은 정기 교육도 받고, 지식인 계층으로 영화에 접근하게 되는데 저는 그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공장 노동, 해병대 생활, 거리의 화가 그렇게 물리적으로 육체를 쓰면서 살다 보니, 영화도 자연스럽게 그 육체성을 담게 된 거지요.”

-어린 시절 권총을 만들어서 논 적도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자전거 부속을 가지고 장난감 수준으로 만들었어요(웃음).”

그는 기계 조립 노동자로 일하던 10대 시절부터 자신의 생산성이 남달랐다고 했다. 빠른 시간에 숙련공, 엔지니어가 되었고 20살에 청계천 작은 공장의 책임을 졌다.

-20살에 공장장이 됐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어린 나이에 인정을 받는구나 싶었죠. 그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전자일 수도 있는데, 저는 책으로 배우진 못했어도 순식간에 원리를 이해하곤 했어요. 가령 대량 생산 기계 칼로 종이를 자르는 경우, 제가 공장장이 되면 생산량이 10배가 늘었어요. 저는 작은 아이디어로 시간을 단축 시키곤 했어요. 그게 영화 작업까지 일관되게 이어졌지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한 장면.

-한국의 아름다운 사계를 보여 준 2003년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스님이 고양이를 안고 꼬리에 먹물을 묻혀서 불경을 쓰던 장면은 무척 신비로웠어요. 김기덕 영화의 즉물적 육체성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전이되는 과정 같았달까요.

“(웃음)기계를 배운 적 없어도 응용을 했던 것과 같은 이치예요. 붓은 동물의 털로 만드니, 아예 고양이를 안고 꼬리로 글을 써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고양이 꼬리가 붓처럼 생기기도 했고요.”

-겨울 신(scene)에서 감독님이 직접 배우로 등장해서 웃통을 벗고 시시포스가 되어 돌덩이를 나르던 장면도 빼놓을 수 없지요. 그 이후론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그 장면이 오버랩되더군요. 신성한 고통을 운명으로 받은 사람 같았습니다(웃음).

“고행의 이미지가 있지요(웃음). 그 장면에서 강원도 아리랑이 배경 음악으로 깔리면서 좀 더 한스럽게 보이기도 했죠.”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아리랑'에 배우로 출연했다.

-실례지만 정규 교육은 정확히 어디까지 받았습니까?

“초등학교는 일산초등학교를 나왔어요. 중학교는 정규 진학을 못 했고, 축산, 원예를 가르치는 농업 학교로 갔어요. 정식 졸업장이 없어서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는 그런 학교였죠.”.

-그리고 1990년, 서른 살에 파리로 간 거죠?

“네. 28살에 해병대를 제대하고, 남산에 시각장애인 교회에서 2년 정도 일을 도우며 머물다 서른에 떠났습니다.”

-떠날 때 특별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림을 그릴 줄 아니까 굶어 죽지는 않겠지 정도였어요. 한국에서는 더는 안 될 것 같아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간 거죠. 그러다 우연히 파리에서 영화를 봤어요. ‘양들의 침묵'과 ‘퐁네프의 연인들'. 그걸 본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어요.”

-지하철과 다리 밑을 떠돌며 살던 자유로운 파리 청년 드니 라방(‘퐁네프의 연인들')에게 동지애를 느끼셨나요(웃음)?

“드니 라방은 정서가 완전히 불안한 사람이었고,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웃음). 하지만 돈도 없고 거처도 없고... 거리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비슷했죠.”

-어쨌든 90년대 파리에서 살아갈 에너지를 얻은 셈이군요.

“네.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몸이 뜨거웠어요. 한국 사회에 있으면서 불가피하게 경험해야 하는 경쟁, 학연, 지연, 혈연 등의 긴장이 없었으니까. 더 자유롭게 ‘스스로 잘하면 뭔가 될 수 있는 사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도 거창한 꿈을 꾼 건 아니고 그냥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면... 이런 정도의 생각이 생겼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시나리오 작가 교육원에 등록해서 치열하게 글을 쓴다. 기본적인 영화 용어는 물론 맞춤법도 서툴렀던 그는 악전고투 끝에, 1995년 시나리오 공모전에 ‘무단횡단'이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이름을 알렸다. 놀랍게도 두 달 마다 한 편씩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매 공모전 출품한 결과였다.

-1996년은 대한민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연도인 것 같습니다. 그해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김기덕의 감독의 ‘악어’가 연이어 나왔지요. 그때부터 전 세계 영화제와 영화인의 사랑을 받는 두 개의 한국 영화 장르가 열렸습니다. 뇌의 표피를 파고드는 지식인 영화(홍상수)와 몸의 표피가 느껴지는 노동자 영화(김기덕)... 동의하십니까?

“네. 서로 워낙 다르죠(웃음). 저는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분이 표현하는 일상의 연애 감정, 아이러니는 제가 할 수 없는 것들이죠. 그 세련됨에 비하면 저는 너무 둔탁해요. 이미지와 이야기를 너무 조직적, 작위적으로 만든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고요.”

-홍상수와 김기덕은 미학적인 지향점이 완전히 다르죠.

“그렇게 해석이 되면 다행이에요(웃음). 홍 감독님은 미국 영화 학교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 영화 영향도 받아서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영화를 만드시더군요. 전 사실 영화에 대한 기초적인 공부도 못했어요(웃음).

변명이 될 수도 있지만, 못 배운 사람이 열정 하나로 영화를 하다 보니, 그게 오히려 하나의 형식이 되어 ‘김기덕 영화'로 자리를 잡은 것 같아요.”

배우지 않고 터득한 지혜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이가 함께했다. 기초적인 공부도 못한 그에게 세계영화제는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사마리아(2004)')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빈집(2004)’), 베를린 영화제 황금사자상(‘피에타(2012)'),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아리랑(2011)') 등 그 외에도 다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상을 안겼다.

그런 명예로운 상황에서도 그는 ‘영화가 세련되지 못하다, 아마추어적이다'라는 비판에 시달렸고, 지속해서 변명을 해야 했다. “특정 사건을 옮겨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야기를 연극적인 기법으로 옮겨 오는 것이라고 설명했어요. 지금도 여전히 저를 인정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죠.”

-남들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을 쉽게 뛰어넘으실 때가 있어요. 가령 ‘풍산개’에서 휴전선을 장대 하나로 점프해서 올라오는 장면에서 무척 놀랐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인위적으로 설정한 ‘경계’라는 게 그리 엄격한 게 아니었구나’... 상식이 시프트되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번 영화 ‘그물’에서도 고깃배가 고장 나서 순식간에 남한군 초소로 흘러오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그런 사건 있지 않았나요? 아침에 군인이 나가보니 남한군 초소에 북한 사람이 있었던 적이, 몇 번 있었을 거예요. 물론 영화에서는 예산 문제로 압축적으로 표현했어요. 경계를 넘는 과정보다 이후의 이야기가 중요해서 이미지로 점프하는 식이죠.”

-형식에 대한 실험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요. 말이 거의 없는 영화 ‘빈집’을 볼 때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가 연상됐어요. 대사보다 이미지를 쌓아 서사를 만드는 기법에서 ‘스크린으로 읽는 문학 작품’ 같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영화 역사 안에 늘 오래된 형식, 장르라는 것이 있었잖아요? 저는 그런 기초적인 고민도 없이 영화를 시작하다 보니 항상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를 주저 없이 실천할 수 있었어요. 영화를 몰랐기 때문에 구사하는 부자연스러움이, 다른 한 편 새로운 형식을 낳을 수 있었던 거죠.”

-여전히 세련됨을 지향하지 않습니까?

“저는 세련됨을 모르는 것 같아요. 훈련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도 같고. 그런데 그걸 바라는 데 안되는 상태는 아니에요. 20년이 되도록 세련됨을 고민하지 않는 걸 보면 제 영화에 그 형식이 어울리지 않아서겠지요(웃음).”

-대외적으로는 일종의 자기 보호 장치로서의 세련됨이 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풍파를 많이 겪으셨지요. 가령 작은 영화가 큰 영화에 가려져 상영 기회를 못 얻는 극장 배급 문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불편함을 드러내셨는데요.

“그때가 아마 제 영화 ‘시간’을 기점으로 ‘괴물’과 논쟁이 붙었을 때였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많은 극장을 줬어도 예산이 없어 광고비를 쓸 수도 없었을 거예요. ‘시간’은 일본에서 투자를 받아 예산 5억으로 찍었고, ‘괴물’은 엄청난 제작 비용이 들어간 데다 광고비 규모도 컸죠.

당시에는 그런 부분을 간과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극장이 균형을 잡고 저예산 영화에도 상영관을 배려해줬으면 하는 열망은 여전합니다.”

왼쪽부터 조재현이 출연한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악어', 장동건 출연으로 주목을 받았던 ‘해안선', 흥행 성적은 좋았지만, 그 폭력성에 논란이 많았던 영화 ‘나쁜 남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위안부 사진집 사건으로 위기에 몰렸던 이승연에게 재기의 기회가 된 영화 ‘빈집', 속죄와 구원의 이미지가 강렬한 ’피에타', 류승범 주연의 개봉작 ’그물'.

-해외 관객들에겐 인정을, 국내 관객들에겐 소외(!)를 겪으면서도 20년간 줄기차게 22 작품을 만들었어요. 대체 그 생산성의 비결은 뭔가요?

“두렵고 싫은 사람이었지만, 제 아버지는 항상 제게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마라’고 귀가 따갑도록 주입을 시켰어요. 제가 노는 꼴을 못 봐서 마당의 풀이라도 뽑게 하고, 돼지우리의 똥이라도 치우게 했어요. 아버지 덕에 항상 가혹하게 노동을 했어요.

그게 기질이 되어서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도 늘 ‘이야기 사냥을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았죠. 항상 영화 장소라든가 이야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를 위한 소재가 늘 끊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1년에 한두 편씩 생산물이 나왔어요.”

-이번 영화 ‘그물'도 10회 차 만에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놀라운 속도예요!

“그것도 결국은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서죠. 음식을 아끼는 것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물건 하나하나까지 아끼는 법을 굉장히 혹독하게 가르치셨어요. 그런 훈련 덕에 적은 비용과 짧은 시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메이저 투자가 아니라 김기덕 필름에서 스스로 자금을 조달할 때는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어요. 하루에 10신(scene)씩 찍어냈죠. 대신 그 전에 혼자서 시나리오 쓸 때, 충분히 상상하고 고민을 해요. 그런 다음 이야기를 현장에서 필름으로 옮기는 과정은 공장처럼 일산 분란하게 찍어내는 거죠.”

-남북한 사이에 끼여 고통받는 역할을 한 배우 류승범은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야생의 에너지가 넘쳤는데, 이번 작품에서 그 에너지를 잘 활용하신 듯합니다.

“현장에서는 긴가민가 했어요(웃음). 편집하며 들여다보니 배우 나름대로 캐릭터의 안타까운 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조절하면서 갔구나 싶었지요.”

-현장에서 긴가민가했다는 건 무슨 말씀인가요?

“말씀드렸다시피 현장에서는 무조건 빨리 찍어내야 하니, 제가 꼼꼼하게 보지 못하거든요. 조역과 단역까지 하루에 10신을 찍다 보면 잘 찍히는지 아닌지, 밥이 코로 들어가는 건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건지도 몰라요. 주연 배우의 액션에 감동을 느낄 시간이 없어요.

‘오늘 열심히 찍어야 돼. 내일로 밀리면 시간과 돈이 더 들어’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달리다 보면, 대부분 테이크 한 번에 컷을 해요.”

-원테이크 오케이라면, 설마 직접 카메라를 잡으셨나요?

“제가 직접 촬영해요(웃음). 일반 현장에서는 카메라를 삼각대에 놓고 한 컷 한 컷 정성껏 세팅하는데, 저는 기둥 하나짜리 모노 트리를 써서 원샷이든 풀샷이든 얼른 찍고 쇼트를 바꿔요. 그러면 카메라 따라 조명 스태프가 우르르 뒤에 와서 비춰주고(웃음)… 기동력 있게 갑니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 ‘그물'에서 우연히 남한으로 쓸려와 남북한 정보부에서 동시에 의심 받는 북한 어부의 불행한 일주일을 그렸다.

-김기덕 감독 영화를 보면 타야 할 기차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에 맞춰 기차역을 향해 달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유가 있었군요.

“숙명이죠. 김기덕 영화가 세상에 보여지려면 그런 숙명은 현재로써 피할 수 없다는…”

-숙명을 관조적으로 받아들이신 듯합니다.

“본격적으로 제 프로덕션을 가지고 시작한 게 ‘사마리아’부터인데, 벌써 10여 편 넘게 그렇게 작업하고 있어요. 훈련이 숙련이 됐어요.”

-주진모가 출연한 ‘실제상황(2000년)’이라는 영화는 3시간 20분 만에 촬영하셨죠? 당시 ‘김기덕 감독의 충동에 관한 철학적 보고서'라는 서브타이틀이 과잉의 해프닝처럼 보였어요.

“이야기에 맞는 형식을 시도해본 거죠. 제 경험을 여러 에피소드로 나눠서 11명의 시퀀스 감독들에게 상황을 던져주고 하루 만에 찍었어요. 모든 카메라를 동원해서요.”

-곧 400억 규모의 예산으로 한 중미 합작 영화 ‘무신(Who is God?)'을 제작한다고 알고 있어요.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일인다역을 하시던 분이 이제는 콘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될 텐데요, 자본이 주는 여유만큼이나 창작의 통제를 받게 되는 건 아닌가 궁금합니다.

“큰 영화지만, 남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만든다는 게 중요하죠. 고맙게도 중국 쪽 영화인과 디 쿡 스튜디오(전 디즈니 회장의 베이징 지사)가 관심을 가져줬으니, 이제 저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일하면서 좋은 장면을 판단하면 될 거라고 봐요.”

-결국, 이야기의 주인이 누구냐가 중요하다는 거군요. 시나리오 집필 방법이 따로 있습니까?

“이야기를 ‘잡으러’ 다니는 게 중요해요. 그러면 어느 날 번개처럼 소재가 떠오르지요. ‘어떤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오면 그걸 잡아서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메모를 해요. 뼈다귀 상태에서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죠.

시나리오 작업에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해요. 벽 앞에 마주 서는 것처럼 턱턱 막히죠. 저는 일단 유치하고 말이 안 돼도 다 씁니다. 초고를 완성한 후, 그다음부터 읽어보면서 허점을 메우고 디테일을 만들죠. 이야기를 넣고 빼다 보면 처음 시나리오는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시나리오가 나오기도 해요. 어설픈 초고라도 쓰면, 거기서부터 구조가 시작되는 거예요.”

-문득 매춘 여성을 다룬 ‘섬’이나 ‘파란 대문’, ‘나쁜 남자’가 요즘 만약 개봉됐다면 ‘여혐’ 논란으로 꽤나 뜨거워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때도 논란은 있었죠. 그런 논란의 이미지들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것 같고.”

-그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영화에서 논란은 항상 전제되는 것 같아요. 영화 자체의 분위기를 비평가들이 관객에게 전해주고 관객들이 그대로 느꼈다면 제가 관여할 수는 없어요. 다만 저 스스로가 가졌던 세계관은 늘 ‘인간’이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왜 늘 누군가는 고통을 주고 누군가는 받아야 합니까?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서 비일비재하지 않았나요? 저는 그 고통 안에 어떤 의미와 메시지가 있다고 믿고 표현하는 것이고요. 어떤 감독은 그걸 기피해서 아름다운 점만 보여줄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게 저와의 차이점일 테고요.”

-김기덕, 이창동, 박찬욱 감독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나쁜 상황을 던진 다음 더 나쁜 사건과 만나게 한 후, 그걸 해결해 나가지요. ‘던져짐’이라는 운명 속에서 박찬욱 감독은 스스로 ‘정죄의 심판자’를 자처하고, 이창동 감독은 신과 인간의 고단한 러브 스토리를 찍고, 김기덕 감독은 속죄를 자처하며 ‘시시포스의 멍에’를 지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그분들과 함께 끼워주면 저는 고맙죠(웃음).”

-그러니까 ‘던져짐’이라는 운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영화의 목적은 오락일 수도 있고 위로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다는 거예요.”

-긍정적인 메시지라니, 정말 의외군요.

“저는 역설적인 방법을 쓸 뿐이죠. 등장인물을 비참하고 냉혹한 현실에 던져놓지만, 그래서 보는 우리는 더욱 그 너머의 속죄와 희망을 갈구하게 되는 겁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는 불상을 안고 산을 오르고, ’사마리아' ‘피에타' 등에서도 종교적인 암시가 있습니다. 의도적인 건가요, 무의식적인 건가요?

“제 영화에 종교적 이미지가 많이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종교일까’라고 생각해요. 가령 ‘봄 여름 가을 겨울’이나 ‘피에타’, ‘사마리아’를 종교적으로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역시도 삶의 이미지가 아닐까요.

‘피에타’의 마지막 장면도 제가 종교적이라고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가신 골고다의 언덕길을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냥 인간, 삶, 인생을 이야기하는 표현의 이미지로 그런 걸 빌려오는 것뿐입니다.”

-종교가 있습니까?

“크리스천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힘들 때만 크리스천이죠. 고통스러울 때만.”

-이후에 계획하시는 영화가 ‘선악과’ ‘요한 계시록’, ‘인간의 시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제목들이 좀 그렇죠(웃음).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 상처를 주고받아요. 저는 그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 못 하는 감정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과연 그런 것들이 개별 인간의 인격의 문제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이건 인간이 가진 원형적 성질의 구조가 문제 아닐까’하는 결론에 이르렀죠. 인간의 구조 안에 그 비밀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선악과’, ‘인간의 시간’, ‘요한 계시록’ 같은 영화로 인간 존재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들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특별히 이창동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분이 인간 사이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인가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분 영화를 보면 배우의 고통스러운 에너지를 최고로 끌어내는 연출과 섬세한 드라마가 있죠. 감동적입니다. 이창동 감독이야말로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시조라고, 저는 생각해요. 세계 무대에선 제가 더 유명하지만, 그분은 저에게 마스터 같은 분입니다.”

-예전에는 반골 기질이 강한 뒷골목 아웃사이더처럼 캡모자를 쓰고 다니시더니 언제부턴가 머리를 묶고 도인처럼 다니세요. 스타일의 변화는 세계관의 변화일 수도 있는데, 어떻습니까?

“한 번도 가보지 않던 히말라야 오지에 갔다가 그곳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눌러앉는 경우가 있지요? 저도 머리 기를 생각은 못 해봤는데, 한때 힘든 일이 많아서 관리를 안 하다 보니 이런 스타일이 됐어요.”

-확실히 구도자적으로 변하셨습니다! 한때 잠적하시고 산에 들어가 생활을 하셨던 이후로 죽 이 스타일을 고수하시는 거죠?

“네. 그때 이후로 그렇게 됐습니다.”

-머리카락의 힘인지(웃음)..., 확실히 그 이후로 영화 세계의 사이즈가 커졌습니다. 폭력적인 노동의 세계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인 관심사가 넓어진 듯합니다.

“네. 작년에 일본에 가서 후쿠시마 원전 이후 한 부부의 이야기를 찍었어요. ‘스톱'이라고 방사능 오염에 대한 영화예요.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그물’도 남북의 긴장된 관계를 고민하면서 찍은 거고요. 국가와 인류가 안전해야 나도 인간의 내면적 고민을 담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겠지요.”

-22편의 작품 중 가장 아끼는 작품 세 편을 골라주시죠.

“‘수취인 불명'이라는 영화는 내 성장을 담은 자전적 영화라 좋아해요. ‘빈집'은 영화 역사상 최초로 구상과 추상을 비주얼로 표현했다는 평을 들었지요. ‘피에타'는 한국 자본주의의 ‘식인’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작품이라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감독은 화가고 배우는 물감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이제까지 다행히 좋은 물감으로 작업을 해오신 것 같습니다.

“나쁜 물감을 썼는데, 좋은 그림이 나온 적도 있어요(웃음).”

-정말 보석 같다고 느낀 배우는 없었나요?

“없었어요. 전 항상 영화에서 제가 중심이기 때문에 배우를 중심에 넣고 쓴 적도 없어요.”

-‘빈집'의 이승연, ‘시간'의 성현아, ‘피에타'의 조민수는 김기덕 감독 영화로 익숙한 통념을 배반하는 강렬한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기회를 가졌던 것에 대해 서로 고마워해야 할 텐데요(웃음).

“그렇군요! 듣고 보니 그녀들에겐 다른 환경이 될 수 있었겠어요(웃음).”

57세의 김기덕 감독. 그의 육체 안에 청계천 노동자도, 해병대도, 거리의 화가도 다 들어있다.

-30대~40대의 김기덕은 대담하고 피해의식이 강하고 저돌적으로 보였습니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한때 영화에 미쳐 사랑과 증오가 가득한 가슴으로 살았습니다. 지금 제가 인간 심리의 구조와 원형질을 폭넓게 고민하는 걸 보면 관용적인 사람이 된 것 같군요(웃음). 관심사도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원전 재해나 남북문제 쪽으로 넓어져 가고 있어요.”

-김기덕이라는 예술가에 대해 세간에 퍼진 편견과 오해 중 꼭 바로 잡고 싶은 게 있습니까?

“제 영화를 좋아하는 부류도 있고 싫어하는 부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마치 인격적인 문제처럼 호도되는 건 옳지 않아요. 과거에 제 영화를 부정해야 스스로가 덜 오염되고 덜 타락한 도덕적인 사람인 것처럼 통용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한때 페미니즘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제 영화는 마초들만 보는 영화라는 편견이 있었어요. 김기덕은 변태고 사이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22편의 제 영화 중 3편만 끝까지 보면 그것이 그릇된 관념이었다는 걸 아실 겁니다. 표현 방법은 비록 거칠지만, 그 공격적인 수면 아래 흐르는 따뜻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이제까지 ‘감독 김기덕’은 영화 텍스트 자체는 물론이고 영화 개봉을 둘러싼 시스템 문제까지 수많은 찬사와 논쟁과 오해와 싸움의 한복판을 지나왔어요. 그 고통을 딛고 계속 영화를 만든 힘은 무엇입니까?

“만약 제가 진실로 극복해 왔다면 그건 인간을 이해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소시민으로 살았지만, 영화 안에서 많은 캐릭터를 운용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인간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어요. 동물은 쉽게 상처를 극복할 수 있지요. 실수라 해도 인간은 풀리지 않는 오해와 상처 속에서 헤맵니다. 저는 그것을 이제 인간이라는 원형질 안에서 이해하려고 해요.”

-득도의 경지에 이르신 듯 보입니다(웃음).

“그것 말고는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것도 자학입니다. 나쁜 감정은 스스로를 해쳐요.”

-누가 당신의 스승인가요?

“자연과 노동과 사람, 그 자체입니다.”

자연과 노동과 야생에서 시작한 인터뷰가 자연과 노동과 사람에서 끝이 났다. 한번을 돌아서 다시 만난 뫼비우스의 띠처럼, 야생의 존재에서 인간의 존재로, 김기덕의 시간이 깊어간다. 그렇게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와 함께 한 우리의 시간도 깊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