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저녁 서울 영등포구 A(여·당시 26세)씨 집에 괴한이 침입했다. 잠들었던 A씨가 인기척을 느끼고 깨자 괴한은 주방에 있던 가위를 들고 협박했다. 괴한은 A씨를 때리며 성폭행을 시도했지만, A씨 허리띠가 풀리지 않자 포기했다. 괴한은 10만원 수표 1장과 현금 60만원을 훔쳐 달아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은 A씨로부터 “범인이 맨손으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는 말을 듣고 물이 담긴 페트병을 가져갔다. 이 페트병은 지문 감식 담당자에게 전달됐고, 괴한의 오른손 검지·약지 지문이 발견됐다. 오른손으로 페트병 위쪽을 둘러쌀 경우 생기는 위치에서 지문이 발견된 것이다. 담당 경찰관은 지문을 지문검색시스템에 등록했지만, 당시에는 같은 지문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경찰이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지문을 재감정하면서 페트병 지문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통상 지문 융선(隆線) 특징점이 12개 정도 일치하면 동일한 지문으로 판정한다. 김모(48)씨의 주민등록발급신청서에 있는 오른손 검지·약지 지문은 페트병 지문과 각각 20개, 17개 일치했다. 검경은 지문 감정 결과를 토대로 이 사건을 재수사했고, 김씨는 작년 9월 특수 강간·강도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김씨는 2006년 12월 이 사건 발생 장소 인근 주택에 침입해 여성을 성폭행하고 물건을 훔치는 등 2006~2008년 세 차례 같은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2008년 기소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다. 김씨는 1995년에도 성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 2003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1심은 올해 3월 “페트병에서 지문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인위적 조작이 개입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지문 위치도 ‘범인이 물을 꺼내 마셨다’는 피해자 진술 내용과 일치한다. 김씨가 2005년 사건 발생 장소 인근에 살고 있었고 2006년 12월 범행과 이 사건 수법이 거의 비슷한 점을 볼 때 유죄가 인정된다”며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김씨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항소했다.

2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8부(재판장 이광만)는 지난 7월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지문 감정 결과 등을 볼 때 김씨가 피해자를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금품을 훔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면서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공소 사실이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입증돼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현장에서 수거했다는 페트병은 현재 없고, 페트병에서 채취한 ‘지문 전사지(轉寫紙)’만 있는 상황”이라며 “페트병을 누가 언제 어떻게 수거했는지, 누가 과학수사팀 현장감식 담당 경찰관으로서 지문감정관에게 페트병을 전달했는지 등 초기 수사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또 “피해자는 범행 장소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그 집 냉장고에서 꺼냈다는 페트병에서 피해자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페트병 출처에 대한 당시 수사 기록이 없는데다 페트병에서 피해자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페트병이 피해자 집에서 나왔는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당시 주거지가 가까웠던 김씨와 피해자가 같은 마트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만진 생수병을 피해자가 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범인이 피해자를 위협하는데 사용한 가위를 경찰이 압수해 지문을 채취하지 않았고, 페트병에서 범인의 침을 채취하거나 감정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1심 판결은 증거의 증명력에 대한 법리를 오해하거나 사실을 오인한 잘못이 있으며, 이를 지적한 김씨의 항소 주장은 이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를 하지 않아 김씨는 무죄가 확정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형사 사건은 재판부 입장에서 90% 이상 입증됐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무죄를 선고한다”며 “과학 수사 기법의 발달로 장기 미제 사건의 범인을 찾아 법정에 세우고도 사건 발생 당시 수사 업무 처리가 미진해 무죄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사건의 경우 검찰도 문제점을 알고 상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