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와 책상이 있는 단출한 방.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에세이 ‘내 방 여행하는 법’은 42일간 가택 연금을 당한 저자가 익숙한 풍경을 다시 보면서 얻는 통찰을 보여준다. 내 방을 여행하는 건 어쩌면 예측 가능한 여행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처방전일지도 모른다.

'내 방 여행하는 법'이란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것이 광적으로 여행을 권하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담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책 아래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알찬 여행을 위하여'라는 부제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책은 놀랍게도 1790년대 국가에서 불법이라 규정한 결투 때문에 42일 동안 가택 연금을 당한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에세이였다.

그는 군인이었는데, 이 우연한 책을 계기로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 '시베리아의 젊은 여행' 같은 책도 썼다. 나는 이 정체불명의 18세기 작가가 쓴 책을 읽기 전, '여행의 기술'을 쓴 알랭 드 보통의 추천사를 먼저 읽었다. 보통이 쓴 짧은 글에는 '통찰'이란 단어가 두 번이나 들어가 있었다.

여행과 통찰. 그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21세기의 여행은 20세기 여행과 점점 다른 의미가 되고 있다. 여행의 우연성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모든 걸 예방할 수 있다고 믿고 자랐다. 여행 역시 불가해한 위험성을 낮추는 쪽으로 진화했다.

구글맵 덕분에 길을 잃는 위험을 덜 수 있게 되었고, '트립 어드바이저'가 있는 한 형편없이 맛없는 음식을 먹게 될 가능성 역시 줄어들었다. 24시간 연결된 세상에서 새 친구를 만나는 우연은 점점 줄어든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우리가 대화하는 건 내 옆에 있는 사람, 즉 미술관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스마트폰 속 익숙한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고독을 경험하려면 자신에게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나와 대화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점점 더 외로워질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능력을 키우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바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의 여행은 낯선 세계로 들어가 낯선 사람을 만나고 뜻밖의 경험을 하며 자기 성장과 성찰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여행은 집을 통째로 짊어진 채 공간 이동을 하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고전 속 빨강 머리 앤이 했던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참 멋진 일이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니까요!"란 말의 마법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여행의 의미가 협소해지는 건 이 시대의 강박인 효율성이 멀리 떠난 여행에서조차 우리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라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효율성의 강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웃지 못할 해프닝들이 일어난다.

가령 에펠탑 아래 잔디밭에서 프랑스 독립 기념일의 불꽃 행사를 보는 아름다운 연출 사진과 사진 밖 프레임의 실제 상황이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시민 통제를 위해 경찰로 가득 찬 파리 시내, 쏟아져 나온 사람 무리에 짓눌린 내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비로소 떠나온 집을 그리워하게 된다. 익숙한 냄새와 사물들, 무엇보다 내게 깊은 휴식을 제공했던 나의 방을 말이다.

"사랑의 배신을 겪고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과 담을 쌓으려는 음울한 생각으로 가득한 그대여, 밤의 상냥한 은둔자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규방에 평생 틀어박힌 그대여, 그대들도 오라! 로마와 파리를 보고자 그 먼 길을 수고스럽게 떠났던 여행자들을 비웃으며 우리랑 하룻길 조금씩 가자! 우리를 가로막을 게 무언가. 우리 자신을 기꺼이 상상에 내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면 될 것을!"

'내 방 여행하는 법'은 역설적으로 여행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처방전일 수도 있다. 떠나는 것에 진절머리 난 사람들, 패키지 관광객이 아니라 창의적 여행객이 되려다가 맥을 놓아 버린 사람들,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결코 어디로도 떠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위한 책 말이다.

"베카리아 신부의 척도법에 따르면 내 방은 북위 45도에,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다. 벽에 바짝 붙어서 걸으면 둘레가 서른여섯 걸음 나오는 장방향의 방이다. 하지만 내 방 여행은 이보다 더 긴 여정이 되리라. 왜냐하면 나는 어떤 정해진 규칙과 방법을 따르지 않고 종횡으로 누비기도 하고 비스듬히 가로지르기도 할 것이기에, 지그재그로 걸어볼 것이며, 기하학이 허용하는 온갖 동선으로도 걸어 보리라."

어쩌면 이 책은 '다시 보기'에 관련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제껏 매일 보는 물건에 별 뜻 없이 적용하는 '보다'라는 동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 말이다.그렇게 책의 저자는 42일 동안 감금당한 자기 방에서 침대와 의자, 거울, 여행용 외투, 방 안에 걸려 있는 초상화와 애견 로진을 본다. 로진이 여행용 외투의 아랫자락을 물어 당기며 자신의 상체와 하체가 만들어 내는 삼각형의 한 꼭짓점에 앉아 조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는 방을 거닐다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형상화한 초상화에 대해 말하고, 결국 거울 속에 걸린 자신의 얼굴에서 깊은 통찰을 이끌어낸다.

"신사 숙녀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 말고 자신 있게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다른 그림이나 광경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 내가 말하는 회화 작품이란 바로 거울이다. 여태껏 이 작품을 두고 감히 비판하려 든 이는 없다. 누가 보더라도 이 작품은 군말을 허용치 않을 만큼 완벽하기 때문이다."

'보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언제 우리는 그것을 진짜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매일 보던 내 방에 대해 글로 쓰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우리는 친숙한 책상과 의자 침대를 비로소 '볼' 수 있다. 만약 내 방을 여행한 후, 벽에 붙어 있던 책상을 창가 쪽으로 옮긴다면 우리는 책상과 창문 밖 풍경의 관계에 대해 비로소 다시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 방을 여행하다가 비로소 특정한 시간에 비치는 햇살 때문에 더 쉽고 명료하게 보이는 먼지나 그림자와 조우할 수도 있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내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명확히 보이는 것 중에는 말라가는 화분과 오전 11시의 블라인드가 그려내는 그림자, 오래된 책상의 닳아빠진 모퉁이가 있었다. 처음 샀을 때 뾰족했던 책상 모퉁이는 나를 위해 한 남자가 사포로 열심히 문질러 놓은 것이었다. 조심성이라곤 하나 없는 내가 모서리에 긁히며 지나다니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해놓은 조치였다. 나는 어느새 책상에 다가가 뭉툭하게 순해진 책상 모서리를 손끝으로 만지고 있었다. 손끝에선 오래된 호두나무 냄새가 났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보다'의 또 다른 동의어가 떠올랐다. 그건 '느끼다'였다. 그 순간 나는 내 방이 살아있는 기억들로 가득 찬 나 자신의 내면 풍경 같다고 느꼈다.

●내 방 여행하는 법―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