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충남 당진 톨게이트의 합덕 방향으로 나와 32번 국도를 타고 20분쯤 달리면 '솔뫼(소나무 언덕) 성지'에 닿는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제 서품을 받은 성(聖) 김대건(세례명 안드레아)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가 박해받았던 조선 후기에 중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귀국해 포교 활동을 하다 25세의 나이에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다는 형벌)을 당해 순교했다. 2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성지 안에 복원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앞에 앉아 고개 숙여 기도하는 모습이 생중계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솔뫼성지를 "한국 교회 초기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순교 성지"로 표현했다.

지난 1일 열린‘도보 순례’행사에 참여한 사제와 수녀, 수도자, 천주교 신자들이 버그내 순례길 구간인 충남 당진시의 합덕평야를 걸어가고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던 당진시는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순교했던 곳이다.

교황 방문 이후 솔뫼성지를 방문하는 사람은 주말을 기준으로 평균 1500여명. 교황이 오기 전보다 3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성지에는 솔뫼라는 이름에 걸맞게 300년 수령의 소나무 30여 그루가 솔내음을 풍긴다. 영상관과 유품 전시설로 구성된 김대건 신부 기념관에선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福音)을 전파했던 그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신앙의 못자리'로 일컬어지는 솔뫼성지는 19세기 충청도 천주교 순교자들의 역사가 깃든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당진시는 2010년부터 총 60억원을 들여 13.3 ㎞(4시간 30분 코스)의 순례길과 주요 유적지를 정비했다. 얼마 전 솔뫼성지에서 만난 이용호 신부는 "800㎞에 이르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교하면 대단하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버그내 순례길에 담긴 순교자들의 정신만큼은 지극히 숭고하다"고 말했다.

한 세기 가까이 충남 지역의 천주교 역사와 함께한 합덕성당. 유럽 고딕 양식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솔뫼성지에서 합덕읍내를 지나면 황금색 벼가 가을 바람에 일렁이는 합덕 평야가 나온다. 논 주변 농로에선 가벼운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곳을 찾았던 정용인(43·경북 김천시)씨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아이들과 종교 역사도 공부하고 트래킹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합덕평야에서 한 시간여를 걷다 보면 붉은색 쌍탑 건물이 나타난다. 1929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합덕성당이다. 경기 광주시에서 왔다는 김지선(38·여)씨는 "유럽 중세시대 건축물처럼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답다"고 말했다. 성당 뒤편에는 현재의 합덕성당을 지은 페랭(Perrin·한국 이름 백문필) 신부의 묘와 묘비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끌려가 순교한 페랭 신부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해 묘엔 유품만 묻혀 있다. 그 옆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생 최양업과 김대건 신부를 가르친 매스트르 신부 등 성직자들이 잠들어 있다.

[[키워드 정보] 산티아고 순례길이란?]

합덕성당에서 3.7㎞ 떨어진 지점엔 성동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샘인 '원시장·원시보 우물'이 나온다. 내포지역(충남 서북부) 첫 순교자인 원시장과 사촌 원시보가 함께 물을 마셨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1.7㎞를 더 걸어가면 야트막한 언덕에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묘가 있다. 1972년 발굴 당시 목이 없는 시신 32구와 묵주 등이 발견되자 마을 주민들이 6개의 봉분에 나눠 합장을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배교(背敎)를 거부하다 순교한 성 손자선(토마스)과 그의 가족 묘 14기도 이곳에 있다.

버그내 순례길의 최종 종착지인 신리성지는 조선의 '카타콤바(지하교회)'로 불린다. 초가집과 성당 앞으로 빌바오 언덕, 상징조형물로 꾸며진 역사공원이 펼쳐져 있다. 초가집은 손자선 성인의 생가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프랑스 출신의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Daveluy) 주교가 21년간 사목 활동을 했다. 다블뤼 주교가 병인박해(1866년~1867년 조선 조정이 천주교도를 학살한 사건) 때 붙잡혀 참수 당하기 전까지 쓴 '조선 순교사 비망기'엔 국내 천주교회사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순교자들의 흔적을 따라 버그내 순례길을 걷다 보면 당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닷새마다 장이 서는 합덕읍내의 합덕전통시장은 오늘의 당진을 보여준다. 후백제 시대의 견훤이 축조한 제방인 합덕제(合德堤)와 합덕수리민속박물관에선 선조들의 농경 문화를 접할 수 있다. 김홍장 당진시장은 "교황거리 및 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충남 지역 천주교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