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뮤지컬·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 속에서 남녀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 지난 25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고스트버스터즈'는 1984년 원작 영화 속 남성 4인조 주인공을 '여성 4인조'로 바꿔 버렸다. 유령에 빠진 공학자와 물리학자가 모두 여성이고, 원작에서 '예쁘지만 맹한' 금발 미녀 역할은 영화 '토르'에서 무지막지한 망치를 휘두르는 근육질 남자 배우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았다. 이뿐 아니다. 할리우드는 1980년대 대릴 해나와 톰 행크스가 주연한 '스플래시' 리메이크작에서 '인어공주'를 '인어왕자'로 바꾼 이야기를 준비 중이고, 돌연변이 영화 'X맨'의 늑대인간 울버린의 캐릭터도 여자로 바꿀 예정이다. 이른바 '젠더 스와프(Gender Swap·성 역할 교체)' 코드다.

전문가들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여성 파워가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본다. 뮤지컬이 대표적이다. 문화 평론가 김헌식씨는 "여성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면서 여성이 괴물을 퇴치하는 히어로물이 나오고 남자 배우가 여장(女裝)하는 '헤드윅' '킹키부츠' 같은 뮤지컬이 각광받고 있다"며 "걸그룹을 만들 때도 요즘은 남성보다 여성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더 많이 갖춘 '걸 크러시(Girl Crush)'를 염두에 두고 기획한다"고 말했다. 걸크러시는 '소녀'(girl)와 '반하다'라는 뜻의 크러시 온(Crush On)을 합성한 말로, 여성이 동성에게 느끼는 성적 감정이 수반되지 않은 강한 호감을 뜻한다.

1980년대 4명의 유령 잡는 남자들이 등장했던 ‘고스트버스터즈’가 여성 4인조로 리메이크됐다(왼쪽). 삼국지의 제갈량이 여자라는 전복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웹툰 ‘여자 제갈량’.

삼국지의 책사(策士)인 제갈량을 여성으로 바꾼 웹툰 '여자 제갈량'도 인기다. 이 작품은 '성별 반전 대하드라마'로 불렸다. 출신이나 인종·성별 때문에 재능을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풍자하기도 한다. 김달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마초들의 직장에서 일하게 된 '여직원 제갈량' 같은 분위기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중국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김달의 또 다른 작품 '환관제조일기'에선 여성 주인공이 도자장(刀子匠·집도하는 사람)으로 나와 '거세용 칼을 드는' 무시무시한 소재를 코믹하게 그려낸다.

대중문화에서 활발한 '성 역할 넘나들기' 전략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재 개발 차원을 넘어섰다. 영국에서 여성 정치인 테리사 메이가 총리에 오르고, 미국에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대세'가 되는 등 여성 리더십의 부상은 세계적 흐름이다. 로마, 파리, 마드리드, 토리노 등 유럽 대도시에서 여성들이 잇달아 시장(市長)에 당선되고 있다. 이에 대한 남성들의 위기감이 '여성 혐오'(여혐)적 행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스트버스터즈'도 유튜브에 처음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 남성 이용자들이 집단적으로 '싫어요'를 눌러 구설에 올랐다.

남성이 전업주부로 나오는 어린이 TV 애니메이션 ‘애슬론 또봇’.

성 역할의 역전은 애니메이션도 예외가 아니다. 요즘 인기인 자동차 변신 애니메이션 '애슬론 또봇'에는 주인공 백해일의 엄마가 로봇을 만드는 왈가닥 과학자로 나오고 차분한 성격의 아빠는 육아와 살림을 담당한다. 여성계에서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이른바 '백마 탄 왕자'와 '가련한 공주'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의도적으로 벗어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영실업 구기원 팀장은 "요즘 가정에선 엄마들이 사회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아이들 공감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보고 만든 설정"이라며 "아버지도 무기력한 가장이 아니라, 매우 전문적으로 집안일을 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대중문화 평론가 김봉석씨는 "대중문화에서 잠시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해서 이를 곧이곧대로 현실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할리우드에선 오히려 여성 주인공 역할이 최근 줄어들고 남성 중심의 제작 관행이 강해지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젠더 스와프'가 나타난 측면도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