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낫다"는 말이 있다. 천재적이라서 더욱 위험할 수 있는 자기중심적 기억은 객관적 기록을 통해 교정된다. 이러한 교정의 과정이 축적되면서 인류 문명이 진보해왔다.

흔히 나일강을 비롯한 오리엔트 하천 문명, 지중해 문명, 대서양 문명, 태평양 문명의 흐름으로 문명사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 저변에는 상형문자나 쐐기문자, 라틴어, 근대적 민족어, 민족어에서 세계적 보편어(lingua franca)가 된 영어로 된 기록 등이 축적되어 왔다. 황하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중화 문명도 한자(漢字)로 된 기록물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졌다.

김명섭 교수

시공간을 넘어 이루어지는 기록을 통한 소통이 공동체의 발전과 팽창을 추동하고, 그러한 소통의 부실이 공동체의 약화와 소멸을 초래했다.

이번에 세계기록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은 세계 기록 문화의 최첨단을 공유하고, 한국의 기록 문화를 세계 기록 문화의 발전 체계 속에 접맥시키는 한편 한국 기록 문화 발전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아울러 소실돼가는 근현대 한국 기록의 보존 및 정리를 통해 내실을 기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이 직접 쓰고 말한 기록을 집대성하여 문화재로 보존해야 한다. 한국의 대학도서관에 '김일성전집' '박헌영전집'은 있어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전집은 없다. 역대 대통령 문집을 발간하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남긴 기록도 개인적 호오와 공과를 떠나 시대적 상징성과 함축성이 크다.

새로운 과학기술과 기록 문화를 접맥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국무장관 시절 공식 이메일 계정 대신 사적인 이메일 계정을 사용한 것이 쟁점이 됐다. 미국 연방기록법은 정부 정책 결정자들의 업무와 관련된 서한과 함께 이메일 등을 공공 기록물로 규정하고 보존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한국도 기존의 기록물을 디지털화하는 한편 처음부터 디지털 방식으로 생성되는 기록물에 대한 체계적 보존과 관리를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어떤 기록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1960년 평양에서 'Facts Tell(사실은 말한다)'이라는 기록집이 발간됐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이 기록집은 '미국 제국주의와 리승만 도당'이 6·25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 왜곡을 위해 편집된 것이었다. 이것은 기록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사례로 남았다.

인류 문명사에서 기록 문화의 발전은 각종 대의를 앞세운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기록 문화인들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기록 문화의 독립성과 투명성에 대한 위협에 맞서서 이러한 기록 문화인들의 정신적 전통이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에서 개최되는 세계기록총회가 여전히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기록을 취사선택하고 있는 동북아 여러 나라들에서 기록 문화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파급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