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진이 7번홀에서 퍼팅 스트로크를 하는 동안 캐디인 아버지가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딸에게 우산을 씌워주려다 골프 규칙을 어긴 캐디 아버지는 죄지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시간 남짓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초췌했다. 천신만고 끝에 우승을 차지한 딸은 "그동안 저를 위해 고생하신 아빠께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라며 "아빠, 고마워요"라고 했다.

28일 강원도 정선의 하이원 골프장(파72)에서 막을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하이원리조트여자오픈. 1부 투어 데뷔 2년째인 김예진(21)에게 이날은 생일에 첫 우승까지 차지한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자칫 힘든 상처로 남을 수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해발 1200m에 자리 잡은 하이원 골프장은 기온이 뚝 떨어진 데다 적지 않은 비까지 내려 마지막 라운드에 나선 많은 선수가 애를 먹었다. 김예진은 고진영과 공동 선두로 4라운드를 출발했다. 첫 홀 보기를 했지만 5·6번홀 연속 버디를 잡아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그런데 7번홀(파4)에서 30cm짜리 파퍼팅을 하는 순간 사건이 벌어졌다. 퍼팅을 하는 김예진에게 우산을 씌워주던 캐디가 퍼팅 스트로크를 할 때까지도 우산을 치우지 않았다. 캐디는 아버지였다.

골프 규정은 '선수가 스트로크할 때 타인이 비바람을 막아줘선 안 된다'고 돼 있다. 이를 어기면 2벌타를 받게 된다. 비 오는 날엔 대부분 퍼팅 준비를 하는 선수에게 우산을 씌워주지만 퍼팅 스트로크를 하기 전에 우산을 거둔다. 김예진은 규정을 어긴 걸 인식하지 못해 7번홀 스코어를 파로 적었다. 당시 스코어상으로는 5타 차 선두였다.

김예진은 "8번홀 홀아웃을 할 때 다른 선수가 이의제기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며 "9번홀을 마치고 경기위원장이 벌타 사실을 확인해 줬다"고 했다. 최진하 KLPGA 경기위원장은 우산을 씌워준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주며 2벌타를 부과했다.

9번홀을 끝낸 김예진의 스코어는 8언더파에서 6언더파로 바뀌었고, 9번홀 버디를 잡은 김해림이 2타 차까지 추격했다. 김해림은 10번홀에서도 버디를 잡으며 1타 차로 쫓았다. 그렇지만 우승 경험이 없는 김예진은 흔들리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아빠가 너무 미안해하셨어요. 아빠는 원래 잘 웃고 힘을 주시는 편인데 눈도 못 맞추시더라고요. 그런 아빠를 보고 더 독하게 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비는 계속 내렸지만 아버지와 딸은 10번홀부터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김예진이 28일 하이원리조트여자오픈에서 데뷔 2년 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캐디를 맡아 주신 아빠가 퍼팅할 때 우산을 씌워준 실수 때문에 너무 미안해하셔서 더 이를 악물고 쳤다”고 했다.

결국 김예진은 버디 3개, 보기 3개, 더블보기 1개로 2타를 잃었지만 합계 5언더파 283타로 우승해 상금 1억6000만원을 받았다. 2위는 김해림(3언더파)이었다.

김예진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고 한다. 야구 선수 출신이지만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었던 아버지는 딸을 통해 꿈을 이루고 싶었다. 키 170cm에 시원한 장타가 일품인 김예진은 "아빠의 운동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캐디를 맡은 아버지는 든든한 파트너이기도 했다.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쳐 프로에 데뷔한 김예진은 신인이던 지난해에는 10등 이내에 10차례 들었지만 올해 퍼팅 난조에 빠지면서 9번이나 컷 탈락했다. 새로운 코치와 스윙을 고치면서 이번 대회를 준비했다. 어머니가 태몽으로 매화 꿈을 꿨는데, 이번 대회 직전 같은 꿈을 또 꾸었다고 해서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