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본 검사하랄 때 진짜 파본 검사하면 바보 아닌가요?"
지난달 9일 서울 마포구의 한 시험장에서 토익(TOEIC) 시험을 치른 취업 준비생 이모(24)씨는 이날 파본 검사 시간에 문법·어휘 문제 6문제를 풀었다. 시험 시작 종이 울리기 전 시험지를 나눠 주고 잘못 인쇄되거나 찢어진 부분이 없는지 검사하는 시간이 2~3분쯤 주어지는데, 이때 문제를 몰래 풀어뒀다는 것이다. 이씨는 "듣기 디렉션 시간에 푼 문제까지 포함하면 10개 넘게 풀었을 것"이라며 "영어 학원에서 강의 첫 시간에 알려준 고득점 요령"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날 시험에서 토익 900점을 넘겼다.
전국의 취업 준비생들이 무더운 여름을 영어 학원에서 보내고 있다. 한국토익위원회 조사에서 대학생 53%가 이번 여름방학 때 취업 준비를 위해 "토익 등 어학 점수를 취득하겠다"고 답했고, 유명 어학원들은 7~8월 동안 인근 건물까지 빌려 토익 특강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토익 점수가 만점에 가까운 고득점자도 정작 취업 후 영어가 필요할 때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영어 학원에서 '영어 실력'이 아닌 '토익 900점 넘는 비법'을 전수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토익 푸는 기계라고 생각해라"
영어 학원이나 인터넷으로 토익 강의를 들은 대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강사가 알려준 요령이 점수를 올리는 데 120% 도움됐다"고 말했다. 예컨대 토익 고득점 요령이라는 것은 ▲과거분사(pp)와 현재분사(ing)가 헷갈릴 땐 과거분사로 찍어라 ▲답을 몰라도 형용사는 찍지 마라 ▲듣기 문제에서 'I don't know(모른다)'가 나오면 무조건 정답이다 ▲한 달에 두 번 시험 있으면 두 번 다 응시하라 등이다. 학생들은 문제를 끝까지 읽지 않고도 정답이 될 확률이 높은 보기를 빨리 골라내는 기술을 알려주는 강사가 '1타 강사'라고 했다. 파본 검사 시간에 문제 푸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토익 770점이었던 박모(31)씨는 "학원에서 이런 요령을 배우기 시작한 지 넉 달 만에 920점을 받았다"며 "강사가 첫날부터 '영어 잘하고 싶으면 외국에 가라. 여기서는 점수만 받으면 된다. 스스로 토익 푸는 기계라고 생각하라'고 세뇌시켰다"고 말했다. 박씨는 "영어 실력이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원하던 점수를 받았으니 만족했다"고 말했다.
토플(TOEFL)이나 토익 스피킹 등 다른 영어 시험 강의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생 신모(24)씨는 "토플은 수험생마다 시험 시작 시간이 다른데, 듣기와 말하기 영역 사이의 쉬는 시간에 다른 사람이 말하기 시험 보는 것을 엿들어 문제를 미리 파악하라고 배웠다"며 "부정행위가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점수 따야 하니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했다.
◇"외국인 만나면 숨고 싶다"는 토익 950점 직장인
한국토익위원회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이 지원자에게 요구하는 토익 점수 평균은 738점이다. 900점 이상을 요구하는 경우는 국제 협력이나 해외 영업 분야 등으로 한정돼 있다. 한 다국적 기업 인사 담당자는 "우리는 영어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데도 서류를 받아보면 90%가 토익 성적을 제출한다"며 "지원자들은 혹시나 영어 점수가 없으면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들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은 토익 점수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주변에서 '토익 900점'이 기본이라고 하니 불안해서"라고 답했다. 토익 920점을 받은 박씨는 "채용할 때 '토익 성적이 있는 사람은 제출하라'고 공고하는 기업이 많은데, 그런 경우 몇 점이어야 서류 통과 안정권인지 알 수가 없다"며 "실제 취업에 높은 영어 점수가 도움됐는지는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위안이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요령과 편법으로 영어 고득점을 받게 되니 입사 후에도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많다. 지난 4월 한국토익위원회 조사에서 직장인 46.3%가 자기 계발을 위해 또다시 영어 공부를 한다고 응답했다. 대기업 3년 차인 하모(27)씨도 입사 전 토익 학원을 석 달 다니고 950점을 받았다"면서 "하지만 입사 후 갑자기 외국인 손님을 맞이해야 할 때면 말문이 막힌다"고 말했다. 하씨는 "학원 다니면서 토익은 200점 넘게 올랐지만 실제 영어 실력은 그대로"라며 "외국 클라이언트가 참여한 회의에서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을 땐 숨고 싶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