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주 라디오 작가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이다. 영화 주인공 유미코의 남편 이쿠오는 작은 단칸방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다. 옆집 노부부가 켜놓은 라디오다. 아마도 노부부는 귀가 어두웠던가 보다. 라디오 소리가 매일 벽을 넘어왔다. 이쿠오가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유미코도 곁에서 같이 들었다. 그 장면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라디오란 그런 것이다. 벽을 넘어가는 것. 공유한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 것. 벽 너머의 사람일지라도 같은 순간 함께 웃게 하는 것.

라디오국(局)에서 20년을 일했다. 시작할 무렵은 좋은 시절이었다. 최고의 스타들이 매일 출연했다. 음반 시장에 대한 영향력도 막강했다. 지금은 달라졌다. 거칠게 말하는 이들은 "라디오 시대는 끝났다, 미래가 없다"고 한다. 위기인 것은 분명하다. 라디오 청취자가 터무니없이 줄어들었다. 요즘 세상엔 좋고 재미난 것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 빠르다. 듣고 싶은 음악을 엽서에 적어 신청하고 DJ가 틀어줄 때까지 여러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제 무엇으로 라디오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최근 반가운 기사를 봤다. 시집(詩集) 시장에 모처럼 활력이 돈다고 한다. 시집만 파는 서점도 생겼고 제법 잘된다는 소식. 한때 아름다웠던 것들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한때 사랑받던 것들은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다. 물론 전제가 있겠다. 본연의 모습과 가치를 잃지 않아야 한다. 라디오도 그렇지 않을까.

20년 동안 끊임없이 받아온 질문이 있다. "라디오 작가로 일하는 것, 쓸쓸하지 않아요? 라디오 원고는 허공에 사라지잖아요."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공기를 타고 전해져 마음에 적히는 글'이라고 생각하며 일했다. 오래전 '스타카토 라디오'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 라디오 작가로 살아가는 행복에 대해 적었다. '라디오 작가로 살기 위해 나는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했다. 더 많은 영화를 보고 꾸준히 음악을 들어야 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매일 내 생각을 청취자들과 나눠야 하기 때문에.' 라디오맨에게 청취자는 늘 곁에 있는 연인과 같다. 글이든 그림이든 공연이든 좋은 것을 볼 때면 늘 생각한다. 우리 청취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을 좋아할까…. 그런데 어떻게 허무하고 허망하겠는가. 같이 있어 매일 더 채워지는데.

다만 슬럼프는 있었다. 청취율이 상당히 오랜 기간 좋았는데 어느 날 질문하게 된 것이다. "청취율 1위. 그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때마침 동료가 사회적 책무에 대해 말했다. "라디오를 통해 받은 것을 어떻게 세상에 돌려줄 수 있을까." 어리석게도 그제야 나는 라디오가 여전히 지닌 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내겐 생각이 통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내 고민을 들은 피디가 기사 하나를 오려 건넸다.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에 관한 것이었다. 음악 학교를 세우고 빈민가 아이들에게 음악 교육을 했다. 총과 마약과 범죄에 노출되어 있던 아이들의 손에 악기가 들리자 삶은 달라졌다. 엘 시스테마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도 구로구청 산하에 비슷한 음악 클래스가 생겼다고 했다.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특집을 기획했다. '드림하이―꿈을 노래하라'는 제목이었다. 오락물 위주의 FM 방송에선 낯설 수도 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취지를 전하자 최고 스타들이 선뜻 내레이션을 해주었다. 방송을 듣고 많은 청취자가 방송에 나온 아이들 앞으로 악기며 간식을 보내왔다. 한 교복회사는 아이들이 공개 연주회 때 입을 수 있도록 단체복을 선물했다. 두 시간 내내 마음이 뜨거웠다.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 속에서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라디오에 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들으면 웃어넘기게 됐다. 어떻게 미래가 없을 수 있는가. 따뜻함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심지어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의 외로움을 어떻게 채워줄 수 있는가'이지 미래가 있고 없고는 나중의 문제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고향을 찾은 쳇 베이커가 연인 제인과 함께 허허벌판 앞에 서 있다. 제인이 말했다. "외로웠겠구나. 형제도 없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쳇 베이커는 대답했다. "트럼펫이 있었지. 음악도 있었고. 그리고 라디오."

라디오가 있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외롭더라도 덜 외로울 것이다. 주파수가 같다면 라디오를 듣는 순간, 우리는 함께다. 벽을 넘고 경계를 넘어 우리를 이어주는 것. 라디오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