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밤길을 떠도는 백귀(百鬼)와 인간의 시체에 붙는 시귀(屍鬼)에 이어 께름칙한 도시괴담으로 얘기가 흘러갔다. 교고쿠 나츠히코, 요코미조 세이시, 오노 후유미….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가 일본의 미스터리 대가를 나열할 때마다 청중 50명은 살갗을 쓸어내렸다. "우리나라에선 아직까지 미스터리·호러물 좋아한다고 하면 좀 이상한 사람 취급 받죠. 예전에 호러사이트 운영하시던 분은 집에 경찰이 와서 '얘기 좀 하자'고 한 적도 있대요. 편견 접고 이젠 좀 즐길 필요가 있어요."

14일 밤 경기 파주 교하도서관, 열대야를 퇴치하는 희한한 행사가 열렸다. 가장 대중적인 문학, 장르문학을 일으켜보자는 '장르문학 부흥회'다. 3회째 이 행사를 이끌고 있는 장르문학 전문출판사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가 "날도 더운데 시원하게 놀아보려는 취지"라고 했다. 행사를 함께 기획한 교하도서관 전은지(35) 사서는 "젊은 층의 장르문학 인기가 대단하더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날의 밤샘 행사가 성사됐다. 만화가·번역가·드라마작가 등 직종과 연령을 망라하는 장르문학 팬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경남 밀양에서 온 이리나(48)씨는 "대학생 아들 데리고 서둘러 신청했다"고 말했다.

15일 새벽 3시, 교하도서관 문헌정보실에 50명의 장르문학 마니아가 모여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김봉석씨와 더불어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김탁환 소설가가 연사로 등장해 입담을 펼쳤다. 박 대표는 미국 SF소설계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맨'(1976)으로 서두를 열었다. 집사 로봇이 스스로를 인간처럼 바꿔 임종을 맞고, 결국 인간으로 인정받는 내용의 소설이다. "로봇의 내장(內臟)이 부품이 아니라 유기물이라면 어떨까요. 자아와 의지가 있다면요. 소설이 시작했지만 조만간 현실에서 맞닥뜨릴 질문입니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을 내세운 추리소설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등을 집필한 김 작가는 자신의 20년 작가 인생을 빌려 추리소설의 기본을 논했다. "홍대용이 쓴 '을병연행록'에 서양식 파이프 오르간을 엄청나게 길게 묘사한 부분이 있어요. 누각부터 내부 실내까지 세 쪽 넘게 이어집니다. 집요한 관찰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죠. 이게 뒷받침돼야 추리에도 논리가 생기는 것이고요." 김 작가는 꽃을 사랑하다 못해 꽃에 미친 '백화보'(百花譜)의 작가 김덕형의 집요한 관찰기를 보고 그를 추리소설 주인공으로 삼기도 했다. 박제가는 '백화보' 서문에 이렇게 썼다. '벽(癖)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 기예를 익히는 건 벽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장르문학에 빠져버린 이들은 새벽 2시부터 암호를 해독해 도서관 소재 미확인 도서를 찾는 추리 게임을 펼쳤다. 부활 의식을 치르는 부두교 신자처럼 열심이었다. 작당은 오전 10시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