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에 별도나 많고 요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중략).'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 '아리랑'이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저항과 애수, 그리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불굴의 의지.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도 대지에 굳게 서서 발걸음을 떼는 소. 바로 이중섭의 대표작 '흰 소'다. 한복 입은 한국인을 상징하는 흰색의 소는 잔뜩 긴장한 듯한 몸짓과 거칠고 빠른 필선, 상기된 눈빛과 굳게 다문 입 그리고 웅혼한 발걸음을 보여준다. 바로 민족 가요 '아리랑'에서 느낄 수 있는 회한과 이별과 희망의 비장미를 회화로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멸의 걸작 '흰 소'는 이중섭의 생애 중 가장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한국전쟁 직후 약 6개월간의 통영 시절에 그려졌다.
단언컨대 '흰 소'는 순식간에 그린 작품이다. 그와 자주 비견되는 또 다른 위대한 화가 박수근이 인고의 정신으로 고요히 수양하는 수도사 같은 작업 형태라면, 이중섭은 불현듯 무언가를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휘발성 표현으로 단숨에 그려내는 전형적인 천재형 화가다.
10호의 작은 크기지만 화면 밖으로 소가 튀어나갈 듯이 꽉 차고 역동적으로 그려진 '흰 소'. 군더더기 없이 그려진 골격이 인수봉 큰 바위처럼 웅장하다. 그리고 꼬리는 산봉우리에서 모진 비바람에 구부러지고 비틀리면서도 견뎌온 고목 같고. 황량한 대지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떼는 소의 모습이 보는 이의 눈높이보다 약간 위에 있어 위압적인 자세. '대가리'마저 보는 이를 향해 돌려진 채 응시하고 있어서 더욱 당당해 보인다.
그림은 뿔로부터 시작됐다. 오른손을 쓰는 화가들은 대개 화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그려 나간다. 이중섭 소 그림의 뿔들은 크지 않다. 피카소의 소는 뿔이 크다. 저돌적인 스페인 투우다. 소를 즐겨 그렸던 이응로와 김기창의 소뿔도 대개는 크기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중섭의 소는 공격적인 모습보다는 인내와 끈기로 묵묵히 역경을 이겨내는 은유다.
회청색의 바탕 위에 나이프를 이용해 흰색 위주로 대략적인 소의 형상을 만들고는, 검은색을 기름에 개어서 붓에 묻힌 후 폭풍이 몰아치듯 빠른 붓질로 세부를 묘사했다. 마치 바위틈 난초나 바람에 나부끼는 풍죽을 그린 묵화처럼 순식간에 거친 붓질로 그려냈다. 그리고는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잠시 숨을 죽인 후 조심스럽게 핑크색을 만들어서 짧은 세 번의 획으로 그려진 '불알'. 걸음질에 출렁이는 소불알을 그리면서 원시적 생명감에 중섭은 은밀히 즐거워했을 것이다.
소 너머의 음울한 배경색은 작가의 운명에 대한 예감인지, 이중섭은 이 작품을 그리고 불과 2년 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간염이 사인이 됐고, 40회 생일 열흘 전의, 무연고자 사망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입장료: 성인 7000원(덕수궁 입장료 1000원 포함), 유치원 및 초·중·고교생 4000원
▲문의: (02)522-3342, www.jungseob.com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월요일 휴관)
※수·토 오전 10시~오후 9시(10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