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에서는 해마다 '올해의 색'으로 다양한 의견을 내놓지만, 지금의 색은 단연 '실버'다. 패션 브랜드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여성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 것은 파격이 아니라 유행이 됐다. 80~90세 패셔니스타들 사진이 인스타그램을 장식하자 할머니를 따라 입는 '그래니 시크'(Granny Chic)까지 유행하기 시작했다.
패션 브랜드 아이그너의 이번 시즌 모델은 95세의 아이리스 아펠. 그는 이미 2012년 화장품 브랜드 맥과 손잡고 자신의 이름을 딴 컬렉션도 내놨다. 이 백발의 '센 언니'는 백악관에서 케네디, 레이건 등 미국의 유명 대통령들과 함께 수많은 디자인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회와 바니스 뉴욕 백화점의 쇼윈도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등 미국의 패션과 디자인계에서 활약해왔다. 알록달록한 옷과 장신구, 얼굴의 절반을 뒤덮는 안경으로 유명한 스타일 아이콘이다. 아펠은 "사람들이 옷은 이렇게 입어야 한다고 정해놓은 규칙이 지루하다고 느껴졌다. 패션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삶에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많기 때문에 모두가 꼭 세련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옷을 잘 입는 것보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그 영국판은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 100세 할머니 보 길버트를 화보 모델로 세웠다. 지난해 셀린느는 패션 사진작가 유르겐 텔러가 찍은 작가 조안 디디온을, 생 로랑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 슬리먼이 찍은 가수 조니 미첼을 광고에 내세웠다. 디디온과 미첼의 나이는 각각 여든하나·일흔셋이다. 이들이 등장한 광고에선 하얗게 센 머리가 백금색으로 우아하게 빛난다. 사진작가 아리 세스 코헨은 뉴욕 거리에서 멋지게 차려 입은 60~100세 행인들을 꾸준히 촬영해 그 사진을 '어드밴스트 스타일(Advanced Style)'이란 제목의 자기 블로그에 올렸다. 블로그가 인기를 끌며 재작년 동명의 책으로 출간됐고, 블로그의 단골 모델이었던 여든네 살 재클린 타야 머독은 랑방의 모델로 발탁됐다.
패션 하우스들의 대담한 움직임이 실버 세대의 지갑만 겨냥한 것은 아니다. 이 광고에 나온 여자들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 보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세일즈나 마케팅이 아니라 메시지에 더 가깝다. 50년대에 패션잡지 보그 미국판에서 피처 에디터로 활동을 시작해, 현시대 최고의 글쟁이 중 하나로 꼽히는 디디온의 사진을 들여다보자. 선글라스에 가린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패션이란 건 실용적이고 우아하면서, 위트도 있어야 합니다. 스물에나 여든에나 저는 그렇게 입어왔어요. 당신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