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희(왼쪽)가 지난달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역도 대표팀 동료인 남편 원정식과 역기용 원판을 들어 올린 모습.

"역도, 다시 해보지 않을래?"

남편의 말에 가슴속 숨어 있던 열정에 다시 불이 붙었다. 리우올림픽 동메달을 가져온 한마디였다.

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채 역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윤진희(30·경북개발공사)는 런던올림픽을 몇 개월 앞두고 바벨을 놓았다. 베이징올림픽이 끝나고 4년 뒤 금메달을 꿈꾸며 귀 아래에 오륜기 문신까지 새긴 그였지만, 좀처럼 동기부여가 되질 않아 내린 은퇴 결정이었다. 그러곤 그해 네 살 연하인 역도 대표팀 동료 원정식(26·고양시청)과 결혼해 두 딸 라임(4)과 라율(2)을 낳았다. 두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 살아가던 윤진희에게 2014 인천아시안게임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한 아내를 위해 꼭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며 의지를 불태운 원정식은 용상 경기 도중 왼쪽 무릎 힘줄이 끊어지는 큰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관중석에 있던 아내 윤진희는 펑펑 울었다.

원정식은 다가올 리우올림픽을 위해 묵묵히 재활에 매달렸다. 그러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아내에게 함께 운동을 하자고 했다. 처음엔 망설였지만 바벨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다. 윤진희는 "남편이 재활에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 번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3년 8개월을 쉬고 돌아온 그에게 역도는 높은 벽이 되어 있었다. 출산 후 골반이 틀어지고 산후통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터라 쉽지는 않았지만, 윤진희는 바벨을 들고 또 들었다.

작년 대표 선발전을 통과한 그는 어깨 부상을 당하며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틴 결과 그는 8년 만에 자신의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있었다.

8일(이하 한국 시각) 브라질 리우의 리우센트루 역도 경기장. 여자 53㎏급에 출전한 윤진희는 인상 88㎏, 용상 111㎏으로 합계 199㎏을 들었다. 중국의 리야쥔, 대만의 쉬스칭, 필리핀의 디아스 하이딜린에게 뒤져 4위로 밀리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인상에서 올림픽 기록인 101㎏을 들며 기세를 올린 리야쥔이 용상에서 무리한 시도를 하다 1~3차 시기를 모두 실패해 윤진희에게 동메달이 돌아간 것이다.

역도의 윤진희가 8일 열린 리우올림픽 53㎏급 경기에서 바벨을 들어 올리고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은퇴한 윤진희는 두 딸을 낳고 2015년에 복귀해 이번 대회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윤진희 선수 프로필]

동메달이 확정되자 윤진희는 환호했다. 경기장에서 아내를 지켜보던 원정식도 펄쩍 뛰며 기뻐했다. 한국 역도로선 8년 만의 올림픽 메달이었다.

윤진희는 경기 후 울먹이며 "하늘이 주신 동메달"이라고 했다. "남편이 이틀 뒤에 경기가 있어 경기장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굳이 왔네요. 남편 덕에 다시 역도를 시작했고, 기적처럼 두 번째 올림픽 메달도 얻었습니다." 원정식이 달려와 아내를 덥석 안았고, 윤진희는 남편에게 동메달을 직접 목에 걸어 줬다. "아내가 동메달을 딴 걸 아는 순간 5초간 정신이 나갔었어요. 경기장에 나오지 말라는 아내의 말을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원정식은 10일 오전 7시부터 열리는 남자 69㎏급 경기에 출전해 '부부 메달'에 도전한다.

두 딸 라임과 라율이 이 부부가 힘을 내는 원동력이다. 윤진희는 "주말 하루 아이들과 지내다 선수촌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 아이들이 울면서 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늘 가슴이 찢어졌다"며 "그럴수록 역기를 한 번 더 들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안에 이런 오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엄마가 동메달을 따는 순간 한국은 동틀 무렵이었지만 두 아이는 할아버지 댁인 원주에서 엄마를 열심히 응원했다. 방송 중계가 없어 인터넷 중계를 봤다고 한다. 원정식의 어머니 김명순씨는 "큰딸 라임이는 엄마가 1등 못 했다고 잠시 토라졌지만 동메달 받는 모습을 보고 신이 났다"고 했다.

윤진희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남편이 2020 도쿄올림픽까지 출전해 보자고 해서 한 대 때릴 뻔했다"며 "8년 동안 계속 같은 로또 번호를 적어서 당첨된 기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