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의 시점이라면, 그로부터 한 세대 전에 유행했던 '실존주의'와 신세대 상징과도 같던 '서태지'가 같은 카테고리 안에 묶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2016년에 일어났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이 원작이며 삽입곡으로 서태지 노래 20곡을 쓴 뮤지컬 '페스트'(노우성 연출)가 개막한 것.

작품은 '인간은 어떻게 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규정해야 하는가'라는 장중한 철학적 질문을 서태지의 노래를 통해 이야기하려는 듯하다. 원작의 시공간을 가까운 미래의 가상 도시로 바꿔,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에 재난이 닥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무대 위에 그려내려 했다.

카뮈 원작 소설의 배경을 미래의 가상 도시로 바꾼 주크박스 뮤지컬‘페스트’의 한 장면.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어떤 인물?]

[서태지 "'페스트', 매우 감동적..발전 기대된다" 극찬]

하지만 '페스트'는 관객 입장에선 당혹스러워할 만한 작품이다. 일반적인 뮤지컬 문법에서 한참 벗어난 데다 각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도 못했다. 가사가 추상적이다 보니 노래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대사로 극을 진행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지나치게 길어 극 전체를 늘어지게 했다. 일부 배우의 대사 처리는 연습이 덜 끝난 듯했고, 무대 위 동선조차 곳곳에서 어색했다.

감정선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으니 의사 '리유'가 왜 사람들을 살리려 애쓰는지, 기자 '랑베르'가 왜 체제에 저항하는지 알 수 없었고, 주인공 남녀가 언제 연인 사이가 됐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고층 빌딩의 일부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회전하면서 공간을 바꾸는 무대 장치와 SF 느낌을 담으려 한 듯한 안무는 장면에 따라서 완성도에 큰 차이를 보였다.

3시간에 육박하는 이 긴 뮤지컬을 관객이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은 음악에 있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시대유감') "도대체 너희가 뭔데… 내 판단에 제재하는데"('Live Wire') 같은 서태지 노래의 사회 비판적 요소가 빛을 발했고, 극 흐름과 어색하지 않게 어울렸다. 2막 시작과 함께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언제나 함께했던 시간들을 접어두고서…"라며 '마지막 축제'를 부르는 장면은 추억에 젖게 했다.

이 호오(好惡)의 반응이 갈리는 뮤지컬은 오랜 제작 기간 동안 애를 쓴 것에 못지않게 앞으로 손볼 데가 많아 보인다. 서태지 팬뿐 아니라 대다수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9월 30일까지 LG아트센터, 1577-3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