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어수웅 기자

응원도 좋지만 과욕(過欲)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산대 물리교육과 김상욱(46) 교수의 대중을 위한 과학 에세이 '김상욱의 과학공부'(동아시아 刊)에는 무려 16명의 추천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리스트를 확인하다 의외의 이름들을 발견했다. 진화생물학자인 서울대 장대익 교수, 물리학자인 성균관대 김범준 교수,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등 동종(同種) 분야 학자와 저술가야 그렇다 치자. 들뢰즈 전문가인 철학자 김재인, 역사소설로 이름난 소설가 김탁환, '시를 잊은 그대에게'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한양대 국어교육과 정재찬 교수의 이름은 어떻게 된 걸까. 정 교수는 '이 책이 나옴으로써 이제 시는 폭삭 망하게 생겼다'면서 '대신 시는 비로소 자신을 이해해주는 엄청난 친구를 곁에 두게 된 셈'이라고 추천사를 썼다. 도대체 어떤 물리학자길래. 지난 9일 부산행 KTX에 올랐다.

그의 나이와 동갑이라는 50년 가까운 역사의 부산대 물리관 건물 402호. 낡은 연구실 방문을 여니 벽면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화이트보드와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흰색 칠판에는 알파벳과 수학 기호가 가득했지만, 포스터에 적힌 단어는 단 네 글자다. '우주의 시'. 김 교수의 요즘 강의 주제라고 했다.

카이스트 물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하고 양자역학을 가르치는 이 이론물리학자에게 '우주의 시' 1행은 뉴턴의 법칙이다. 'f=ma'(힘=질량×가속도). 김 교수는 "인간은 이 시(詩)를 연구하며 새로운 문명을 만들었고, 이제 발을 딛고 있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과학을 세상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한다는 게 김 교수의 장점. '김상욱의 과학공부'에서 우주의 기원을 다루는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물리학자를 괴롭히는 질문 하나.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요.'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동방신기'."

아이돌 그룹의 변천사로 우주 창조론을 시작하는 과학자라면 그의 유머와 언어 감각을 신뢰해도 되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메르스를 설명하는 그의 글은 카뮈의 '페스트'를 인용하고, 양자역학을 소개하는 그의 설명에는 SF(과학소설)의 고전 '쿼런틴'이 활용된다.

부산대 물리관 402호 김상욱 교수 연구실에는 벽면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화이트보드가 있다. 이론물리학자의 필수품은 커피와 칠판이라던가. 숫자 없이 알파벳과 기호로 가득한 세계에서 김 교수는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꿈꾼다.

김재인·김탁환·정재찬 등과의 인연을 만든 것도 결국 인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소통 의지다. 서울고등과학원 철학 연구원이던 김재인 박사가 '초학제(transdisciplinary)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김 교수는 '융합에서 소통으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며 친해졌고, 정재찬 교수와는 의·치의학 전문대학원 입학시험 출제위원으로 만나 시와 과학을 넘나드는 문제를 함께 냈다. 소설가 김탁환과는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났다. 작가가 박물관에서 열리는 연중 강연 '올해의 과학책을 읽다'의 단골손님이었던 것. 대중을 위한 과학 강연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행사에서 '교과서'로 쓰이는 10권의 과학책은 포항공대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APTCP)가 선정한다. APTCP는 1996년 설립된 국내 최초이자 국내 유일의 이론물리 연구소. 알파벳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이 센터의 첨단 연구를 대중에게 소통 가능한 언어로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부서가 과학문화활동부이고, 김 교수는 현 위원장을 맡고 있다. 말하자면 과학을 '교양'으로 대중에게 알리는 임무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것.

대중을 위한 과학 교양서가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우리가 잘 눈치채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대중의 지지가 없다면 정부의 후원도 없다는 것. 김 교수는 웃으면서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실험실에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인종"이라면서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례는 아니겠지만, 대중에게 먼저 나서는 경우는 자기 연구에 대한 홍보가 목적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미 국가 미래 산업이 된 생명과학이나 반도체는 대중을 위한 과학서가 드물고, 예산을 힘들게 따내야 하는 우주론이나 입자물리, 진화론에 관한 교양서가 양산되는 이유다. 물론 이는 김 교수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역설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사준 전파과학사의 '4차원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세계'를 읽고 진로를 결정했다는 청년은 이제 다른 과학 소년들을 꿈꾸게 하는 중년의 저자가 됐다. 그의 소망은 과학을 인문학과 동등한 '교양'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 낡은 물리관을 나온 김 교수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며 교정의 개울물로 안내했다. 작은 계곡의 분위기까지 간직한 대학 내 시냇물이라니. 부산대 교수와 학생들은 금정산에서 발원한 이 개울을 '미리내'로 부른다고 했다. 미리내는 주지하다시피 은하수(銀河水). 빅뱅과 동방신기 사이, 안드로메다은하와 부산대 미리내 사이에서 이론물리학자가 우주의 시(詩)를 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