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이승철이 '마이 러브'의 첫 소절을 부르자 40~50대 여성들이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30년 전, 10~20대였던 이들은 '희야'를 들으며 "오빠!"를 외쳤다. 청년이었던 가수와 소녀였던 팬으로 만난 이들은 지난 30년동안 각각 노래와 박수갈채로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해왔다.
1985년 말 록밴드 부활의 보컬리스트로 음악계에 첫발을 내디딘 이승철이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지난 1~2일 열린 30주년 투어 '무궁화 삼천리 모두 모여랏'을 개최해 이틀간 2만4000명의 관객을 모았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시간동안 그는 영광과 시련을 번갈아 경험했다. 그는 "19살에 데뷔할 때 서른 살이 되면 은퇴하려 했는데 30주년을 맞았다.오랫동안 정상을 지키려면 시련을 이겨내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더 단단해지고 유연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수많은 히트곡 위에 올라선 정상의 가수로 자리를 굳혔다. "지금껏 노래로 내 자신을 증명했기에, 그리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자리에 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2일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이승철의 '무궁화 삼천리 모두 모여랏' 서울 공연에서 그는 이렇게 운을 뗐다. "제가 가수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직업의 수명은 서른이면 끝난다고들 했어요. 그런데 30년째 하고 있네요." 30여년 전 1985년 말 록밴드 부활의 보컬리스트로 음악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에게 열광했던 10~20대 소녀팬들은 40~50대 중년 여성이 됐고, 이들은 또 10~20대의 아들딸과 함께 공연장을 찾았다. 30년동안 바뀐 건 팬뿐이 아니다. 홍안의 미(美)청년은 어느새 검게 그을린 아저씨가 됐다. '희야'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서쪽 하늘' '네버엔딩 스토리' 등 두 시간이 넘는 공연에서 다 소화하기 힘들 만큼 히트곡이 쌓였다. 사고와 스캔들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악동'이었지만 최근에는 교도소 재소자 합창단, 대안학교 청소년 합창단, 탈북자 합창단을 이끌면서 매년 아프리카 차드에 공연 수익금 중 일부를 보내 학교를 짓고 자선 사업으로 신문 지면에 나온다. 쨍쨍하게 울리던 초고음(超高音)에서 힘을 살짝 빼자 그 여유는 인생에도 함께 찾아왔다.
서울 공연을 앞두고 남산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만난 이승철은 반팔,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체력 관리를 위해 주 5일 유산소 운동을 한단다. 공연을 앞두면 매일 마시던 술도 끊고 식이조절에 돌입한다. "무대에 올라가는데, 턱선 정도는 만드는 건 예의이기 때문"이란다. '슈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선 독설로 주목받았지만, 실제로는 입을 세 번 열 때마다 한 번은 좌중을 웃기는 달변이었다.
―공연 앞두고 운동을 하나?
"체력 관리를 해야 하니까. 평소에 워낙 많이 먹는데다, 매일같이 술을 마신다. 5㎏ 뺐고, 앞으로 2㎏를 더 뺄 거다."
―1년 내내 공연 중인 것 같다.
"상반기, 하반기, 크리스마스 세 차례 한다. 1년에 40회 정도 하는 것 같다. 지난 30년간 했던 공연이 2000회는 족히 넘는다. 공연을 할 때마다 처음 오는 관객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90% 이상이다. 언제나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셈이니 공연을 매번 똑같이 해도 된다는 뜻인데, 내가 지겨워서 안 된다.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까지 공연하고 싶다."
―이번 공연 제목이 '무궁화 삼천리'다.
"부제가 '마라에서 울릉까지'다. 30주년을 맞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 다녀보자는 거다. 하반기에 마라, 울릉, 태백, 소록 등 문화 소외 지역에서 무료 공연을 할 예정이다. 오랜 숙원이었다."
―히트하진 못했지만 아끼는 '명곡'이 있는지.
"난 무조건 히트한 곡이 좋다. 셀린 디온 공연에 갔을 때 내가 모르는 노래 나오면 지루하다. 히트곡 많은 가수일수록 공연에서 유리한 게 당연하다. '희야'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네버엔딩 스토리' 같은 노래는 전주만 나와도 청중들 반응이 확 온다."
―데뷔 때부터 30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히트곡을 낸다. 노래 실력, 그리고 노력 덕분일까?
"노래 실력과 노력은 기본이지 자랑할 게 아니다. 특히 노래 실력은 가수라면 누구나 갖고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정상을 지키려면 시련을 이겨내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스캔들이나 주변의 반대, 건강 문제 등은 언제나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넘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건 재능일 수도, 운일 수도, 업일 수도 있다."
―시련을 어떻게 이겨냈나?
"안 좋은 일 있으면 '노래로 증명하라'는 조언을 누가 해주더라. 결국 내가 갖고 있는 걸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방송 출연정지 당했을 때 5년 동안 언더그라운드 생활 하면서 공연만 했다. 라이브가 튼튼하다는 얘기가 그때 나왔고, 롱런의 밑바탕이 됐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수 될 때 집안 반대는 없었나?
"할아버지가 설립한 학교에 다녔고, 학교 이사장이 삼촌, 학생 주임이 아버지였다. 사촌 형제·자매들을 다 합치면 80명 정도인데, 다들 서울대 갔다. 나만 빼고. 아버지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히트하기 전까지는 집안 행사에 데려가지 않으시더라. 그런데 지금은? 무슨무슨 모임만 있으면 제발 좀 와달라고 아우성이지.(웃음)"
―운(運) 같은 거 말고 진짜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
"어려운 일 있었을 때 (음반) 제작사 사장이 이별을 고하더라.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아침 7시부터 LP랑 '박카스' 들고 방송국 PD와 언론사 음악 기자들을 직접 다 찾아다녔다. 그때부터 소속사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한 게 비결이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공연에서 하고 싶은 것에 다 투자했고, 그게 쌓이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아직도 혼자 다 하나?
"인생 매니저가 생겼다. 아내다. 결혼하면 활동에 지장이 생긴다는 아티스트들도 있지만, 나는 그 반대다. 혼자서 결정할 때보다 둘이서 같이 상의해서 결정하는 게 낫다. 아, 상의가 아니라 컨트롤을 당하고 있다. 컨트롤 당하는 게 너무 편하다.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컨트롤 당하고 있나?
"회사 운영부터 의상까지 다 한다. 나는 아내가 사주는 대로 입는다, 속옷까지. 봉사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는 것도 다 크리스찬인 아내 덕분이다."
―두 딸에게도 조종당할 것 같다.
"딸 아빠들은 다 그렇다. 대학생인 첫째는 원래 속이 깊고, 사춘기도 안 겪었을 만큼 속을 썩인 적이 없다. 둘째는 아홉 살인데 나 닮아서 예체능에 뛰어나다. 수영, 발레, 노래 다 잘한다. 학교를 어디 보낼지 고민 많이 했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영국 학교에 보내려고 직접 다녀오기도 했고, 뉴질랜드까지 답사도 갔다. '불의 고리'라 포기했지만.(웃음) 지금은 한국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닌다."
―30년 후배인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달라."직업에 귀천이 없고 전문성과 창의성을 최고로 치는 시대다. 근데 1만 시간의 법칙을 실천한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걸 갖고 1만 시간의 노력을 먼저 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희망도 있어야지. 내가 홀로서기를 할 때 가졌던 게 바로 희망이었다."
이승철은
1966 서울 출생
1985 그룹 '부활'로 가요계 데뷔
1989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이승철 독집앨범 발매
1994 전국 투어 콘서트 시작
2001 한국사랑의집짓기운동연합회 홍보대사
2005 20주년 기념 'Emperor of Live'
2014 탈북청년합창단과 함께 독도 공연
2015 제42회 한국방송대상-문화
예술인상2016년 유엔세계
NGO 콘퍼런스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