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피아니스트

믿거나 말거나, TV 드라마에 나와 달라는 캐스팅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배우가 아니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의 '손'을 대역하는 거였다. 눈물을 머금고 거절한 이유는 짧고 독특한 엄지손가락 생김새 때문. 끝이 뭉툭하고 손톱이 옆으로 넓게 퍼진 반달 모양 손가락은 너무 특이해서 잘생긴 남자 배우의 손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이 손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다.

내 키는 대한민국 남성 평균 신장을 웃도는데 손은 평균치보다 작다. 엄지손가락만큼 새끼손가락도 짧다. 헌칠하게 키 큰 10~20대 학생들 손을 볼 때면 조금 주눅이 든다. 키가 170㎝ 넘는 여학생들 손가락도 내 것보다 긴 경우가 많다. 부럽다.

스케일이 컸던 미국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1934~2013), 몸무게가 108㎏에 달하는 개릭 올슨(68), 당당한 체구만큼 쭉쭉 뻗는 연주를 하는 러시아의 데니스 마추예프(41)는 손이 그야말로 초대형 야구 글러브 같다. 모차르트 연주에 탁월한 포르투갈 출신 마리아 조앙 피레스(72)의 손은 몸집처럼 조그맣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뉘앙스가 필요한 곡에서 경이적인 아름다움을 뽑아낸다. 남성 피아니스트 중 다니엘 바렌보임, 머리 퍼라이아는 손이 크지 않아도 다루는 레퍼토리의 폭은 놀랄 만큼 넓다.

이상적인 피아니스트의 손은 크기보다 손등의 폭, 튼튼한 골격, 적당히 붙은 살과 근육이 관건이다.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악수하고서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손이 커서가 아니라 부드럽고 살이 많은 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날카로운 터치와 번개 같은 기교가 그 두툼한 손에서 나온다니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피아니스트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손이 더 컸으면 좋겠어." 그는 내가 단 하루만이라도 가져봤으면 하는 훌륭한 손을 갖고 있다. "크고 좋은 손인데 더 컸으면 좋겠어요?" "아니, 아주 조금만 더…." 솔직히 나도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 몸 중 가장 고마운 곳은 부족한 주인을 만나 고생하는 나의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