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우물 밖에서 세상 경험을 한 한국 축구의 유럽 원정에서 가장 인상 깊은 선수는 석현준이었다. 그가 날린 강렬한 슈팅에 세계 정상급인 체코의 골키퍼 체흐가 몸을 움찔하며 막지 못하던 장면이 통쾌했다는 이가 많았다. 겁먹고 주눅 든 우리 플레이에 답답함을 느끼다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인 그는 유럽의 이 팀 저 팀을 떠돌며 실력을 키우고 있는 저니맨이다.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아약스를 시작으로 지금 포르투갈의 포르투에 이르기까지 1~2년 단위로 팀을 옮겼다. 그에게 반했다는 많은 팬이 꼽은 이유는 "주눅 들지 않아서"였다. 아시아에서 1년 넘게 무패 행진을 하던 한국은 스페인을 만나 6대1로 졌다. 겁을 집어먹은 채 동네 축구에서나 볼 법한 어이없는 플레이를 연발했다. 그런데 이 야생마 같은 저니맨은 적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꺼내서 보여주려 했다. 그는 "더 큰 무대에 도전하려면 실수하더라도 자꾸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힘겨운 상대였던 체코에 2대1로 이긴 것도 도전적인 축구를 한 덕분이었다.
스페인에 지고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가 힘들게 뛰어다니는 노동이라면 스페인 축구는 창조하며 즐기는 예술"이라고 했다. 독일에서 유소년 육성을 담당했던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가 달라지려면 유소년을 키우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15년 전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프랑스와 체코에 5대0으로 잇달아 진 뒤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히딩크도 당시 같은 말을 했다.
지난 15년 한국 축구가 노력한 결과가 '오대영'에서 '육대일'로 바뀐 것이라면 허무하다. 겉모습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몸집이 유럽 선수 못지않게 커졌고 잔디 구장도 많이 생겼다. 유럽 팀에 몸담은 선수도 늘었다. 그런데 강팀만 만나면 축구의 가장 기본인 패스부터 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는 허를 찌르는 창의적인 패스가 늘어나는데 우리는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책임 회피성 플레이가 는다. 패스의 목적은 골을 넣기 위한 것인데 백패스가 거듭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초·중·고 대회 현장에 가보면 한국 축구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뿌리가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야, 빨리 안 뛰어" "야, 빨리 공 주라니까" "야, 너 뭐하는 거야" 하는 지도자 호통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실수한 선수는 벤치 눈치를 살피고 죄인처럼 고개 숙인다. 유럽 유소년 축구 취재를 하다 본 장면은 달랐다. 볼을 끌다 공을 빼앗긴 선수에게 코치가 "왜 패스를 안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일대일로 제치면 더 좋은 기회가 생길 것 같아서"라고 했다. 코치는 "그 말도 맞지만 지금 상황에선 패스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호통이 아니라 소통이다. 생각하는 축구, 예술 축구가 이런 토양에서 자란다.
이용수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여자축구부터 미소 운동을 펼쳐볼 생각"이라고 했다. 미소 운동의 미소는 '미안해 소리쳐서'의 준말이라고 한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선 뭘 하라고 하면 '왜?'라고 묻는 선수가 없더라"며 놀라워하던 표정이 지금도 새롭다. 우리 사회 전반이 20년째 선진국 문턱만 맴도는 이유도 축구와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