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루이스 쇼(이하 '조지 쇼' 또는 '쇼')는 아일랜드계와 일본계의 혼혈 영국인 기업가였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조선인의 망명 계획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1963년에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외국인 독립운동가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켜준 든든한 수호자, 일제에 의해 '얼굴없는 테러리스트'라 불렸던 조지 쇼는 1880년 중국 푸젠성 푸저우(福州·복주)에서 태어났다. 조지 쇼의 아버지은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다. 동방에서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는 중국에 정착했고, 조지 쇼 역시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20대 초반 그가 사업을 시작한 곳은 중국이 아닌 조선이었다.

1900년경 평안도 지역에 있는 '은산금광' 회계로 조선을 방문한 조지 쇼는 은산금광의 채산성이 떨어지자 7년 뒤 중국 만주 안둥(安東·안동, 지금의 단둥)현으로 자리를 옮겨 선박업과 무역업을 하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던 1919년, 그는 회사 건물 2층을 임시정부 비밀 정보국으로 내어준다. 더불어 백범 김구, 동농 김가진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탈출을 돕는 한편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폭탄, 비밀 정보 등의 전달에 앞장서 우리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외국인이었던 그는 왜 조선의 항일운동을 도왔던 것일까? 여기에는 자신의 조국, 아일랜드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조지 쇼는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고향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에이레(Eire · 아일랜드의 옛 이름)였다.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정주한 아일랜드에 12세기 후반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잉글랜드가 쳐들어왔다. 영국의 귀족과 영주들의 침입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의 속국이 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오랜 전통과 관습을 무시당하고 가혹한 차별을 받으며, 영국의 폭압적인 지배에 저항했다. 7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아일랜드는 1919년부터 2년 6개월에 걸쳐 독립전쟁을 벌였다. 1922년 아일랜드 독립전쟁 결과, 북부 신교 지역인 6개 주는 영국령 북아일랜드로 존속되고, 남부의 26개 주만 북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독립한 일, 그리고 동족상잔의 내전을 겪은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역사는 한반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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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락을 긴밀히 하기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국내로 드나드는 요충지인 단동에 교통국 지부를 개설했다. 이 교통지부가 바로 조지 쇼가 운영했던 이륭양행 건물 2층에 있었다.

임시정부의 교통지부는 1922년까지 국내와 만주지역 독립단체들 간 교신, 임시정부 자금 조달, 정보 수집, 무기와 지령 국내 반입, 독립운동가 물색 등의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중국과 국내를 연계하는 임시정부 교통국의 중간 거점 역할이었다. 조지 쇼는 교통지부를 지원하면서 국내에서 모집한 군자금을 상해로 수송할 때 통신원에게 그 액수에 해당하는 이륭양행 명의의 수표를 발행해 주었다. 통신원은 그 수표를 쇼가 거래하는 상해 회풍은행에서 현금과 교환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 때문에 쇼는 줄곧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임시정부의 교통국 지부이자 비밀아지트였던 조지 쇼의 이륭양행

실패하기는 했지만, 1919년 11월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망명 계획도 이륭양행을 통해 진행되었다. 대동단* 총재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쳤던 동농 김가진도 임시정부에 가담하기 위해 상해로 갈 때 조지 쇼의 배를 타고 망명할 수 있었고, 의열단의 김원봉이 거사를 위해 무기를 국내로 밀반입할 때도 조지 쇼가 적극 도왔다. 외국인이었던 그가 운영하던 회사와 선박은 치외법권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권한이 미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조지 쇼는 의열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당시 의열단이 폭탄테러를 목적으로 200여 개의 폭탄을 국내로 반입할 때에도 조지 쇼가 도움을 주었다. 미국 작가 님 웨일즈(Nym Wales)가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쓴 책 '아리랑'을 보면 김산이 당시 이 일과 관련해 쇼에 대해 회고하는 구절이 있다.

"의열단은 비밀리에 200여 개의 폭탄을 한국에 들여보냈다. 폭탄은 안둥에 있는 영국계 회사 앞으로 보내는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 회사 소유의 기선에 실어 상해에서 보냈다. 안둥 회사의 지배인은 아일랜드인 테러리스트였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그를 '샤오'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 만큼이나 싫어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상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그의 집에 숨었다"

의친왕 이강(왼쪽), 의친왕이 탈출한 대동단 사건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 1920년 6월 30일자 지면.

계속되는 일본의 추격으로 의열단이 어려움에 빠지자 쇼는 검거되지 않은 의열단 단원을 태워 톈진과 상해로 탈출하도록 도왔다. 일제는 이륭양행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기지로 판단하고 감시의 눈길을 떼지 않았다. 1920년 7월에는 급기야 신의주행 열차를 타고 가던 쇼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지만, 철저히 계획된 체포였다.

쇼의 구속을 놓고 조선총독부 내에서도 찬반 격론이 일자 당시 사이토 총독은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이라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다"라며 구속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쇼의 구속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에 있는 서방인들이 격분했다. 또 런던타임스 등 서구 언론을 통해 쇼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에 반일감정이 촉발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제 법원은 쇼를 수감한 지 4개월 만인 1920년 11월 19일 보석으로 석방했다.

사진= 서대문형무소

안둥으로 돌아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그는 환영 만찬에서 "일제의 체포와 구속에 결코 위축되지 않고 앞으로도 정의를 위해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1921년 1월 그가 상해를 방문했을 때 한국 임시정부는 대규모 환영 집회를 열어주었다. 쇼는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수여한 공로 훈장(금색공로장)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그러나 이후, 이륭양행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쇼는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 일제에 쫓기는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었고, 의열단 단원들이 국내 거사를 추진할 때도 이륭양행 선박을 동원해 지원했다. 의열단의 안둥현 거점이 바로 이륭양행 건물 안에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륭양행의 선박을 이용해 폭탄과 탄약 등의 무기를 운송하였다. 쇼는 독립운동단체에 국내 진입용 모젤권총을 구입해주기도 했다.

일제는 쇼를 탄압하기 위해 그의 일본인 처남을 동원해 이륭양행 인수를 기도하고 쇼의 압록강 항로권을 무력화하기 위해 경쟁사를 지원하기도 했으나 쇼는 영국총영사관 등을 이용해 굴하지 않고 싸워나갔다.

그러나 결국, 쇼는 안둥에 있던 이륭양행을 매각해 1938년 푸저우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륭양행이 사라진 후 임시정부 연락망은 큰 타격을 받았다. 안둥을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의 지원활동 역시 막을 내렸다. 쇼가 상해를 떠난 뒤의 소식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석유판매 등의 사업을 벌이다, 푸젠성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1943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를 극도로 싫어하며 평생을 항일운동에 바쳤던 조지 쇼는 놀랍게도 일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도, 부인도 모두 일본인이었고 며느리까지 일본인이었다. 후대에 와서 조지 쇼의 아내는 일본인 여성 사이토 후미였고,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었던 조지 쇼의 어머니가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일본인임이 밝혀졌다. 또한 쇼의 아들 역시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결혼증명서를 통해 밝혀졌다. 그의 아내 사이토 후미도 후에 남편을 도와 항일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인의 피가 섞인 쇼가 '친일'은 커녕 '반일'인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이유는 사업과정에서 생긴 반일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안둥에서 약 5만 평에 이르는 광대한 토지의 영구임차권을 얻어 제재공장을 운영하고 기선회사를 만들어 운송업·무역업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쇼를 시기하면서 그를 축출하기 위한 공작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쇼는 영국의 극동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상해 상공회의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당시 중국에 있던 영국 상인들은 일제의 방해로 갖가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대체로 반일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쇼 역시 1914년경 상해에서 일본상품배척운동의 선봉에 설 정도로 반일적이었다고 한다.

건국훈장 독립장 정장

한국의 독립을 위해 누구보다 애썼지만 조지 쇼의 이름은 그저 몇 사람들의 기억에 있을 뿐이었다. 이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가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1963년 한국 정부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유족을 찾으면서부터였다.

그후 50년 만에 쇼의 후손이 호주에 살고 있음이 밝혀졌고, 한국 정부는 조지 쇼의 손녀 마조리 허칭스와 증손녀 레이첼 사시를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행사에 초대했다. 마침내 2012년 8월, 조지 쇼의 이름이 적힌 훈장은 추서된 지 반세기만에 후손의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 쇼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015년 3월 30일 밝혔다.

또, 쇼가 세상을 떠난 지 72년이 지나고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인 2015년, 8월 12일에 쇼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시와 외고손녀 조지아 사시가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두 사람은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을 참배하고, 청와대 오찬에도 참석했다. 레이첼은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한국 독립에 힘을 보탠 선조가 대단히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의 외증손녀 레이첼 사시(가운데)와 외고손녀 레이첼 조지아 사시(왼쪽)가 2015년 8월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가족과의 오찬에 참석해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