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사실상 차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여권의 대선구도가 출렁이고 있다.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가 대선 후보로 밀고 있는 반기문 총장이 스스로 출마 의사가 있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4·13 총선 패배로 새누리당의 대선 잠룡들이 존재감을 상실한 상황에서 반 총장이 여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부각될 가능성이 커졌다.
반 총장의 출마가 가시화되면서 차기 대권 레이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반 총장은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20%중반대 지지율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문재인, 안철수 등 야권의 대선 주자들을 약 10%포인트 범위에서 앞서고 있다.
하지만, 직업 외교관 출신인 반 총장이 여론의 검증을 거치지 않았던 점을 한계로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선 레이스에서 검증을 거칠 경우 반 총장에 대한 기대감이 거품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대통령직에 오를 만큼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것도 한계 지점으로 지적된다.
◆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 해야 할지 고민 중”…사실상 대권도전 선언
26일부터 열리는 제주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1년만에 방한한 반기문 총장은 지난 25일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차기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이날 간담회 질의응답 시간에 반 총장은 “내년 1월 1일이면 한국 사람이 된다.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그때(임기 종료 후) 가서 고민, 결심하고 필요하면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내년 대선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반 총장은 이날 국내 정치와 관련된 비판적인 시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반 총장은 “내부에서 여러 가지 분열된 모습 보여주는 것이 해외에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 창피하게 느낄 때가 많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 통합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국내 정치가) 아주 좁은 커뮤니티 인터레스트(community interest·집단 이해관계)나, 파티 인터레스트(party interest·당파 이익) 등을 갖고 하는데 이건 정치가 아니라 정쟁"이라며 "이런 것을 지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반기문 대망론’에 대해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해 72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는 고령이라는 지적에 대해서 반 총장은 “미국 대통령 나온 사람들이 민주당은 전부 70대"라고 맞받았다. 그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자신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보도한 데 대해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정치의) 희생양"이라며 미얀마 민주화, 이란 핵협상 타결 등에서 자신의 기여를 강조하기도 했다.
◆ 새누리당 친박계, 반 총장 대선출마 적극 지지
이날 반 총장의 발언은 내년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 시킨 것으로 해석됐다. 새누리당 친박계는 이미 반 총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뜻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친박 핵심인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은 공개석상에서 반기문 총장의 출마는 ‘상수’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홍 의원은 반 총장과 하버드대 케너디스쿨에서 수학한 사이다. 충청포럼 회장인 윤상현 무소속 의원도 반 총장의 대선 출마를 강력 지지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충청 출신 반기문 총장이 여당 후보로 출마할 경우 이른바 ‘TK(대구경북)+충청’ 연합이 구성되기 때문에 정권 재창출에 유리해진다는 것이 친박 진영의 계산이다. 새누리당의 주력 지지층인 TK와 대선 때마다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 충청권이 연합할 경우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분열된 야권을 이기는 게 어렵지 않다는 게 여권 주류의 판단이다. 지난 4월 이후 실시된 차기 대권 주자 여론조사에서 반 총장이 20% 중반대 지지율로 선두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이런 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자신의 관훈클럽 간담회 발언이 사실상 출마선언으로 해석되자 반기문 총장은 26일 아침 제주 롯데호텔에서 전직 외교장관 및 전·현직 외교부 인사들과의 조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대권도전 표명은 과잉, 확대해석 된 것’이라는 취지의 언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반 총장은 조찬에서 "분열을 시키는 사람이 리더가 돼서는 안된다. 통합시키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언급도 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올해 말 임기종료 후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자택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언급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 국내 정치 경험 부족은 한계…검증 과정 통화할 수 있을지 의문
정치권에서는 반 총장의 대권도전 시사 발언이 내년 대선 레이스 판도를 바꾸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주목하고 있다. 총선 패배로 대선 도전이 가능한 후보군이 사라지다시피 한 상황에서 반기문 총장이 대선 가도에 조기 등판하면서 당의 구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기문 총장의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친박과 비박 사이의 내분이 조기에 수습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하지만, 직업 외교관 출신인 반기문 총장이 국내 정치에 대한 경험이 적다는 것을 한계로 지목하는 목소리도 많다. 국내 정치에서는 검증이 안됐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소속 정갑윤 국회 부의장은 26일 오전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국내 정치에선) 반 총장의 능력검증이 안됐다”며서 “우리는 내치 문제가 정말 복잡다단하다. 내치 부분은 아직 숙제로 남았다”고 지적했다.
반 총장이 친박 후보로 규정될 경우 정치적 운신의 폭이 좁아지면서 파괴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도 YTN라디오에 출연, “친박들이 대거 움직여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살맛이 나겠지만, 그래도 대권 후보라는 것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면서 “친박에서도, 비박에서도 그렇게 용이하게 넘겨주지는 않기 때문에 앞으로 반기문 목장의 혈투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비박계에서 (검증과정에)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라며 “친박에서 반기문 총장을 옹립한다고 하더라도, 비박에서는 강한 검증과 함께 경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정치권의 태풍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남산 위의 소나무가 꺾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북풍한설에 견뎌낼까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