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가 ‘간단한 무용 포즈를 취해 달라’고 주문하자 안무가 김보람이 이렇게 반응했다. 어딘가 썰렁하면서도 심각한 그의 작품처럼.

비키니 수영복, 한복, 원피스, 잠옷, 가죽 재킷.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여자 무용수 5명이 동시에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오며 춤을 춘다. 막춤인 듯 격렬하게 추다가도 우아한 몸짓을 보이더니, 소리치고 뛰어다니기도 한다. 관객 입장에선 참을 수 없이 웃기다가도 문득 '이건 대단히 잘 추는 춤'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요즘 현대무용계에서 주목받는 안무가 김보람(33)이 지난 21일 제35회 국제현대무용제(MODAFE)에서 선보인 신작 '봉숭아'다. 시꺼먼 수염을 기른 범상치 않은 외모의 이 사내가 여성성(女性性)의 철학적 해석에 도전한 것.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성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왜 돌고 구르고 달리느냐고요? 그게 바로 현대무용입니다. 자유로움 그 자체!" 최근 그가 안무하고 직접 출연한 작품 '바디 콘서트' '애매모호한 밤'은 많은 관객을 열성 팬으로 만들었다. 춤을 추다가 난데없이 가위바위보를 하고, 계속 무대를 돌며 뛰다가 총 쏘는 몸짓을 한다. 활달하면서도 황당하고, 썰렁한 가운데 메시지가 담겨 있다. 거기엔 '폼 잡는' 예술이 아니라 삶의 밑바닥부터 단련된 정서적 호소력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무용수가 색안경과 수영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도 이유가 있다. "감정을 표현하는 눈과 컨트롤이 쉽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리는 겁니다. 오직 몸으로만 표현하겠다는 거죠. 냉정하게!"

전남 완도 출신인 그는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의 백업 댄서가 되고 싶던 '춤에 미친 소년'이었다. 상경한 뒤 엄정화·이정현 등의 백업 댄서로 7년 동안 활동했다. 서울예대 무용과에 뒤늦게 진학해 안무가의 길을 걸었고 2008년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를 창단해 지난해부터 안산문화재단의 상주 단체가 됐다. 2014년 '인간의 리듬'으로 한국춤비평가회 작품상을 받았고, 올해 초 이 작품으로 미국 뉴욕의 공연예술마켓 APAP에서 쇼케이스 공연을 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무용계의 고선웅(연극 연출가)'이라 할 만한데, 최근 연극 '한국인의 초상'의 안무를 맡아 연출가 고선웅과 실제로 협업했다. 다음 달 초엔 신작 '언어학'을 무대에 올린다. "자연을 보면 늘 춤을 추고 있고, 인간의 모든 동작도 춤입니다. 저희는 그것을 연구해 몸의 언어를 만드는 겁니다." 그는 "미래엔 몸의 언어야말로 진짜 소통하는 언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언어학' 6월 3일 오후 8시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극장, 080-481-4000